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그와의 첫만남이었던 일년전 그 어느날도 오늘과 꼭 같았었다.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했다. 아무것도 모르는채 작게 지어줬던 그의 미소가 생각나서 견딜수가 없었다.
"지용씨, 괜찮아요?"
"그냥 좀… 그러네요."
끝이 있으리란걸 알고 시작했음에도 사랑에 있어서 난 여전히 바보였고 내일은 그의 사형이 치뤄지는 날이었다.
일년 전 어느날이었나, 잘 울리지않는 핸드폰이 울렸다. 심리 치료사라는 그럴듯한 명패만 달아놓고 실상은 빈 껍데기이자, 치료는커녕 의뢰인에게 막말로 상처를 입히는 나에게 일이 들어온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일에대해 듣자하니 아무도 맡지 않겠다해 내게 주어진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회사의 월급만 똑똑 떼어먹는 벌레같은 존재라지만 백명을 죽인 그런 희대의 싸이코를 상대하라니. 하지만 그에 따라오는 엄청난 보너스는 그런 공포를 다 지워낼만큼 강한 유혹이었고 결국 난, 그런 엄청난 일을 떠안게 되었다.
첫만남, 그 싸이코를 진심으로 치료할 생각도 없었고 능력은 당연히ㅡ 미달이었으니 무슨말을 꺼내야할지 뭘 해야할지 아무생각이 없었다. 그저 혹시라도 생길지모를 불상사에 대비해서 누나가 쓰는 전기총을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만난 그는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 사람같아 보이진 않았다.
"안녕하세요."
"심리치료사?"
"네."
"…안녕하세요."
저음인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거기에다가 어지간한 미남배우 저리가라 할정도의 외모는, 이런 외모지상주의 시대에 살아가기에는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그런 그가 어째서 그런 살인을 저지른건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시간만 때우다 올 생각이었던 내가 그에 대한 관심을 가진건, 그때부터였다.
-
차가 잠시 멈춰섰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찝찝했지만 닦아내기엔 시간이 없었다.이러다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집에가서 쉬고싶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그의 죽음에 대한 예고는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몰랐더라면 오히려 좋았을것을.
파란불이 켜져도 출발하지 않는 나에게 뒤의 차들은 빵빵대며 그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왔다.
손가락으로 눈가를 닦은후 차를 다시 출발시켰지만 답답한 마음은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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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커피만 마시다 끝난 첫번째 만남이었다. 두번째 만남에서는 그래도 월급을 받는 주제에ㅡ게다가 관심이라는게 조금 생겨버렸기 때문에ㅡ아무것도 안할수는 없다는 생각에 상담이란걸 시도해보기로 했었다. 전날밤, 맥주 한 캔을 마시며 그에 대한걸 '검색'도 해봤었다. 아는건 이름뿐이었다. 그 이름만 검색창에 넣었을 뿐인데 딸려나오는 연관검색어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세기의 살인마'
'싸이코패스'
'죽인사람 수'
'백명 살인사건'
그에 감탄을 하며 클릭한 「최승현 백명 연쇄살인사건 정리」 라는 제목의 포스팅은 내게 주어진 자료보다도 더 방대한 내용을 담고있었다. 혹시 경찰 관계자가 아닌가하는 의심을 할정도로. 그 길고 긴 내용을 요약하자면 그는 백명의 사람을 죽였다. 다른나라, 다른인종의 사람들을. 왜 죽였는지도 모른다. 범죄를 재연하는 그 순간에도 그는 뉘우치는 기색없이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채였다고 했다. 그에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차가운 기운에 몸을 떨며 컴퓨터를 껐다. 자세한건 차차 알아가도 늦지 않을테니까.
그리고 다음날, 차차 알아가려던 마음과는 달리 멋대로 움직이는 입을 열었지만 혀가 마음대로 움직이진 않았다. 전기총을 향해가는 손을 애써 저지하며 그에게 물었다.
"백명을 죽였다면서요."
"네."
"용서를 바라나요?"
"…… 아니요."
"… 아니라고?"
아니라고? 속으로만 생각하던 그말을 내뱉고나서야 내가 무슨말을 했는지 깨달아버렸다. 당황해서 입을 틀어막자 최승현, 그의 입에서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 모습이 우습다고 생각하는듯 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충분히 우스워 보이는 내 모습을 하고는 그에게 뭐라할 수가 없었다. 그냥 입을 막았던 손을 떼어내고 도도하게, 왜 아니죠? 라고 묻는 내게 그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채로 대답했다.
"사람들은 나를 용서하지 않아요. 그건 아무리 신부님이나 스님이라도 달라지지 않을거에요. 내가 죽인 사람들에는 그들도 포함되어있었으니까.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들이 모두 날 증오하길 원했어요. 내가 죽인 사람들은 모두 다른나라의 다른 인종의, 같은구석은 없는 모두 다른 사람들 뿐이에요. 그러니까 난, 내말은."
"……."
"그 모두가 나를 증오하길 바랬어요."
그의 눈빛은 침착했지만 증오하길 바랬다는 그 말을 할때만은 번뜩였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최승현의 모습에서는 흔들림이라곤 전혀 찾아볼수 없어서 나는 그만 고개를 돌렸다. 무섭다, 이사람. 상담이란걸 시도한 내가 싫어져왔다.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로 일어서고 싶었지만 의자를 꽉 잡고는 참았다. 그리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사형… 당할걸 알겠죠. 어떻게 생각해요. 싫다거나…."
"그건, 앞으로 심리치료라는 거에 필요한건가요."
"… 그 일환이라고 해두죠."
고개를 잠시 숙이고 땅을 바라보던 최승현은 백명을 죽인 사람답지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아요. 이렇게 될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전에 해보고 싶은건… 사랑받는거. 난, 사랑이 받고 싶었어요."
"……."
"이뤄질리는 없지만."
씁쓸하게 미소짓는 그의 모습은 방금의 그 싸이코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전까지 내가 느꼈던 공포는 어디간건지 의자를 꼭 잡았던 손이 그를 향해 뻗어나가려고 했다. 연민일까? 잘 모르겠다. 그가 연기를 하고 있는걸지도 몰랐지만 어쩐지 그를 보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충동적으로 들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내뱉은 말은 바보같게도.
"내 이름, 권지용이에요."
내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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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은 캄캄했다. 툭, 내려놓은 가방을 어떻게 들어다 놓을 힘도, 정신도 없었다. 내 한몸 건사하기에도 버거웠다. 그런 와중에 술 생각이 어찌나 간절하던지. 컵에 따르고 자시고 할것도 없었다. 병채로 입에 대고 마시자 슬슬 술기운이 올라왔다. 그렇게 기분만 좋아졌더라면 좋았을텐데, 그와의 별거아닌 추억들도 봇물터지듯 쏟아지고 말았다. 빌어먹을, 젠장.
어느새 깔린 어둠속에서 나는 아마, 울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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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과에 간건 점수때문이었어요. 점수 때문에 갔으니 흥미, 없었죠. 간당간당한 점수로 대학을 졸업하고…. 수업을 잘 듣지도 않았었거든요. 게다가 가장 중요한 공감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능력같은거 없었어요. 오히려 싫어하는 편이었죠."
"잘하는거 같은데, 지용씨."
"에? 아니에요. 사실 정말 좋아하는건 음악이었는데 기집애도 아니고 뭔놈의 딴따라냐며 아버지에게 죽어라 맞은뒤로는 그것도 접고.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있는 이 회사도 부끄럽지만 아버지 빽이에요. 낙하산."
이런 얘기 하면 안되는데… 하면서 말끝을 흐리는 내게 최승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지용씨, 빽 있는것도 능력이에요.' 그 말에 웃음이 터진 나는 한참을 웃었고 그는 이런 나를 보기만했다. 치료를 하러온건 난데, 어째 내가 그에게서 치료받는 느낌. 다시 내 위치를 상기해낸 후에야 웃음을 멈출수 있었다.
"난 말했는데, 승현씨는 말 안해줄거에요?"
"네?"
"승현씨 이야기, 해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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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를 하고나서 본 시계는 열두시를 향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를 만나고 온 차림 그대로라는걸 깨닫는데는 오래걸리지 않았다. 집에서 입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내 눈에 사진 한장이 들어왔다. 그와, 나였다. 사진은 결코 찍으면 안된다는 감독관의 말에 꽤나 두툼한 돈봉투를 건네주고서야 찍은 사진이었다. 물론 최승현의 사진은 인터넷에 치기만해도 널려있었지만 그와 내가 함께 있었다는걸 남기고싶은 마음에 찍은 사진이었다. 그때는 이런날이 올줄은 몰랐었는데.
사진을 쓰다듬다보니 아, 활짝 웃은 그와 나의 눈가에 물 한방울만 떨어트리면 딱 우는 얼굴이다. 사실은 그때부터, 아니 처음부터 끝이 오리라는걸 알고 있었던게 아닐까. 마음을 감춘채 겉으로는 다른말만 떠들던 나는 진심을 내놓고 말한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사랑한단말…… 해줄걸 그랬네."
죽을만큼 사랑받아보고 싶다는게 소원인 사람이었는데. 그를 사랑한다는게 내 진심이란걸 조금만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그랬더라면.
-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들지 않았다. 조금만 해달라고 애교를 부려봐도 은은한 미소를 띄고는 '조금만 기다려요' 라고 말하며 내 애간장을 타게 만들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은연중 내뱉는 말들 사이에서 알수 있었다. 그가 고아라는건. 가족에 대한 말을 잘 하진 않았지만 그런 류의 말을 할때 그의 표정은 쓸쓸해서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항상 머뭇거리다 실천에 옮긴적은 없었지만.
하지만 그 '사건'에 대한건 물어보는 대로 곧잘 대답해주곤 했다.
"아무렇지도 않았던건…… 아니죠…?"
"…… 아."
"당신을 탓하려는건 아니에요. 그냥 나는… 아니, 대답하기 싫으면 안해도 괜찮아요. 나는 치료하는 사람이지 상처를 후벼파는 사람은 아니니까…."
내가 한 질문에 내가, 상처받을 그를 보기 두려워 발을 빼도 최승현,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대답했다.
"아무렇지도 않은건 아니었어요. 그래도, 나도 사람인데. 사람들을 죽일때마다 마음이 좋지는 않았어요."
"그럼 자수한건 그래서…?"
"그건 아니에요. 말했다싶이 증오를 느끼고 싶었는데 평생 그대로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괜히 잡혀갈지도 모르고."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는 수갑이 채워진 손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내 앞에 놓인 따듯햇던 커피잔이 차갑게 식을때까지. 떠나기 십분 전이라는 감독관의 말에 그제서야 고개를 든 그를 나는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어느새 뻣뻣해진 자세에서 보인건지 머쓱한 웃음을 짓던 그는 그 전까지는 단한번도 보이지 않았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수한거… 아니 그보다도 사람들을 그렇게 죽인거, 조금 후회되네요."
그의 미소에 심장이 떨린건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땐 그 마음이 점차 좋아지는 치료 대상에 대한 뿌듯함이라고 생각했었다.
"승현씨, 그대로 있어봐요. 우리 사진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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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슴푸레한 새벽이 걷히며 아침이 밝아오고있었다. 그의 사형이 치뤄지는 날. 찬찬히 고여가는 눈물을 참아가며 두른 목도리는 그가 좋아한다는 빨간 색이었다. 빨간색을 좋아하지 않았고 특히나 지금은 자꾸만 죽음이 연상되는 바람에 벗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끝끝내 풀어낼수 없던건, 그의 말 한마디가 머릿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겨울에 코트입고 빨간 목도리하고 웃는 사람이 좋아요.' 라고 이상형을 묻는 질문에 했던 그의 답이.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다듬던 나는 마지막으로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눈물이, 떨어졌다.
-
"승현씨는 이상형이 누구에요?"
"저는 음…."
내 얼굴을 한번 슥 보던 그는 시선 둘 곳을 못찾아 이리저리 헤메다 결국 내 두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딱히 누구라고 할건 없고… 그냥 겨울에 코트입고 빨간 목도리 하고 웃는 사람이 좋아요."
"빨간 목도리? 빨간색 좋아해요?"
"그냥… 잘 어울릴거 같아서요."
"그런가…?"
"… 흰 얼굴에 푸른계열은 너무 추워보이니까."
그때의 나는 코트에 남색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
그가 자신의 방에서 처형장까지 가는 사이에 어쩌면 볼수 있을지도 모른다는게 담당 신부님의 말이었다. 그 말만을 믿고 그 근처에서 서성이던 내겐 확신이 없었다. 그를 볼 수있다는 확신이, 그리고 내가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수 있을까 하는 확신이.
하루하루 더 차가워지기만 하는 날씨에 잠깐 서있었을 뿐이었는데도 손이 얼어붙었다. 혹시나 그를 놓칠까 손을 하하 불면서도 시선은 앞을 향하고 있던 내 눈에 저 멀리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최승현, 그였다.
언젠가 당신이 죽을때가 된다면 어떨것 같으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는 떨지 않고 단숨에 대답해나갔다. 마치 오랜 시간동안 그랑 장면을 꿈꿔왔던 사람처럼. 그리고 지금 나를 발견한 그는, 그때 말한것처럼 담담한 표정에 아무렇지 않다는듯 행동했지만 눈만은, 그 깊은 눈동자만은 심하게 떨리고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걷는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왜, 온거에요.'
사랑해서, 그래서 보고싶어서.
짧은 말인데, 내 입은 얼어붙은것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는, 웃었다.
낮은 철조망 하나를 두고 그가, 스쳐갔다.
'쾅'
처형장의 문이 닫혔다.
볼을 타고 한 방울, 눈물이 흘렀다.
"다… 끝이야. 끝났어……."
다, 끝났다.
마지막까지 아무 말도 하지못한 나는 사랑에 있어서 여전히 바보였고, 다시는 사랑하지 못할 터였다.
*
승진을 했다. 아버지의 입김이 불었기 때문이겠지만 전처럼 화를 내지도, 올라간 월급에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럴 틈같은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를 떠나보낸 뒤로 나는 내가 아니었고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갔다. 그전에는 몰랐었다. '최승현'이란 사람의, 그 존재감의 크기를. 너무도 컸기에, 그 속에서 숨쉬는게 익숙해져버린 나는 그를 익숙하게만 받아들였던게 아니었을까.
작게 한숨을 내쉬고 창문을 열었다. 아직도 겨울이건만, 어쩐일로 햇살이 따스했다. 커피 한모금을 들이키며 햇살을 즐기다 갑작스레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짜증이 조금 치밀어올랐다. 문을 열자 이런저런 편지와 통지서를 손 한가득 든 인턴이 까칠하다는 나에 대한 소문을 들은게 역력한 표정으로 그를 내밀었다.
"펴… 편지요."
"… 많이도 보냈네…."
"아, 안녕히계세요!"
후다닥 도망치는 인턴을 헛웃음을 지으며 보다 문을 닫고 들어왔다. 대부분 승진을 축하하는 카드가 대부분이었다. 하나하나 무심코 쓰레기통에 넣다가 발견해버렸다.
'보내는 사람 : 최승현'
그리운 눈물을 불러오는 그 이름을.
한참을 그대로 서있었던가, 차마 편지를 뜯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편지를 읽자마자 후두둑 떨어질지도 모르는 눈물이 두려웠다. 아니, 아니. 그냥 그에 대한 그리움이 터져나올게 두려웠다. 그게 회사안이라면 더더욱 안되는거였다.
결국 조퇴를 끊고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와 뜯은 편지봉투 속에는 세장의 종이가 가지런히 접힌채로 들어있었다. 종이를 펼치자 급하게 쓴듯한 글씨가 그를 대신해 말하고 있었다.
「지용씨, 어제보고 오늘 또 이렇게 편지를 쓰네요. 시간이 얼마 없어서 그러니까 글씨가 엉망이어도 이해해주길 바래요.
저는 이제 곧 죽으러 갑니다.
놀라진 않았길 바래요. 어쩌면 지용씨는 알고있었죠? 어제 날 보는 눈빛이 많이 흔들렸었거든요. 나한테 말해주고 싶었었나봐요. 어제 지용씨가 '저기…' 라는 말을 몇번했는지 이제야 알았네요.
내 이야기를 많이 궁금해 했었죠. 언젠가 말해줄 생각이었는데 끝이 너무 빠르게 다가와서 편지로나마 남겨요. 별건없지만.
난 말이죠, 꽤나 유명한 남자배우의 사생아였어요. 매춘부였던 어머니는 날 낳자마자 버렸죠. 지용씨는 날 고아라고 알고있겠죠? 맞아요. 내 세계에서 내 아버지가 나오는 영화를 보는 나는 그의 아들이 아닌 그냥 고아였어요. 딱히 그들을 원망하진 않지만 사랑받지 못한 어린시절의 내가 가엽긴해요.
지용씨한테한 말, 거짓말이었어요. 증오를 느끼고 싶다고 말하면 도망갈줄 알았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그때의 나는 열여덟이었어요. 잠에서 깼는데, 사람이 죽어있었어요. 내손에는 피가 묻어있었고 나는 도망갔어요. 기억도 나지 않는사이에 그렇게. 사람을 죽였더니 많은 관심이 쏟아졌어요. 어쩐지 내가 비밀스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죽였어요. 내 온몸 구석구석을 빛이 빛출 수 있도록. 그러면 나한테 빛이 날거 같아서.
그런데 그럴리가 없죠. 처음엔 딱 열명만에서 시작한게 백명이 되었어요. 백번째 사람을 죽이던날 깨달았어요. 나는 지금 빛이 아닌 어둠에 침식당한채 혼자 착각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래서 자수를 한거에요.
그리고… 지용씨를 만났죠.
언젠가 지용씨가 나한테 물었던 적이 있었어요. 죽음이 두렵지 않냐고. 나는 기다리고있다는 투로 대답했죠. 두렵지 않다고. 나는, 괜찮다고.
그런데 있잖아요 지용씨, 나 지금 떨려요.
아 감독관이 재촉을 하네요.
지용씨, 사랑을, 관심과 애정을 숨막힐만큼 줘서 고마웠어요.
그랬던 지용씨를 어쩌면 나는.」
그의 편지는 그렇게 끝나있었다. 눈물이 걷잡을수 없을만큼 흘러내렸다.
어쩌면, 그는 나를 사랑했던 걸까. 늘 웃어주던 그 얼굴이, 흔들리던 눈빛이, 푸른 계열이 추워보인다고 했던 목소리가 그리고 끝나버린 편지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던걸까. 그 마음을 모르고 혼자 앓던 내가… 바보였나.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그 와의 첫만남이었던 이년 전 그 어느날도 오늘과 꼭 같았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지금은 없는 그 에게 달려가 말해주고 싶은 날이었다.
사랑한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