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연이라도 좋다.
너는 한 송이의 꽃. 노랗고 빨갛고 독이 있는 한 송이의 나리꽃. 화려하고 아름다워도 결국 한낱 들꽃이다. 너도나도 너를 꺾으려 손을 뻗었지만 아무도 그 대가는 치르려 하지 않았다. 너는 말했지, ‘싸구려이더라도 팔리기만 하면 됐어.’ ‘머라카노 가스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오히려 너는 웃었다. 코를 훌쩍이면서, 진주 같은 반짝임을 눈초리에 매달고. ‘가스나라고 하지 말랬지.’ 너는 항상 핀잔했지만 난 가스나란 말이 좋았다. 경상도 남자에게 가스나란 소유물, 세상 모든 풍파에 맞서 지켜야 하는 것. 널 만나고 내 여자란 말은 평생 못 쓰게 된 나니까, 그 어떤 여자보다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너니까. 너는 내 거니까, 라고는 쑥스러워 말 못 했다. 그래서 가스나란 말을 일부러 더 썼었지.
네 소포는 잘 받았다. 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잡지 속 너는 낯설었다. 내가 아는 너는 통통한 볼 살이 보드라운, 개구진 웃음을 짓는 소년이었는데, 흐늘흐늘한 종이에 맨질맨질하게 인쇄된 너는 야윈 얼굴로 나를 표독스럽게 쏘아보고 있더라. 그래서 알았다. 네가 내게 마지막으로 보여주었던 그 눈빛에는 사실 미움 따위 조금도 없었다는 것을. 비겁하게 도망치는 순간조차 너는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카메라와 필름과 잉크와 종이를 거치고서야 비로소 너는 나를 미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네가 울었으면 했다. 나를 붙잡고 엉엉, 처음 만났을 때처럼 울어제꼈다면 핏줄이고 뭐고 다 버리고 영원히 네 곁에 남았을 것이다. 내 마음이 거기 남아 끝없이 그 순간을 되풀이했듯이 내 몸 또한 다시는 너를 떠나지 못 했으리라. 그러나 몇 번을 반복해보아도 그곳에 눈물은 없었다. 그렇게나 눈물이 많은 너는 내가 떠나가라고 단 한 방울의 눈물조차 참은 것이다. 새빨갛게 독이 오른 눈은 그 때문이었다고, 사실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처음 만난 그 순간을 아직 기억할까. 너는 그때도 한 송이 나리꽃이었다. 음악을 바람처럼 흔들리던 너. 톡톡 튕기고 유연하게 살랑이는 몸짓은 생기가 넘쳤으나 꼭 감아 숨긴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쿵쿵대는 스피커와 현란한 조명에 귀먹고 눈먼 욕망들 속 몸을 내던진 네 모습이 너무나도 위태로워서, 나도 모르게 인파를 헤치고 뛰쳐나갔다. 꽃줄기마냥 마른 손목을 잡아채어 도망치듯 클럽을 나왔다. ‘너 도대체 뭐야?’ 네가 손목을 놓자 바르르 떨며 소리를 질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화를 내고 어이없어할지언정 그 눈에 비치는 것이 있었다. 절벽이 아닌 내 앞에 네가 피어있었다……(하략)……. 』
***
"반성문 한 번 거창하네."
"와, 마음에 안 드나?"
"솔직히 말해봐, 이거 다른 사람이 써준 거지?"
"가스나, 읽어봤으면 알 거 아이가. 이기 써달랜다고 될 기가?"
억울한지 최승현치고 말이 길었다. 그 자존심에 고작 편지 한 장 대필하라고 네 연애사를, 특히 네가 잘못한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시시콜콜 이를 리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저 대학노트를 북 찢어 마구 휘갈긴 글씨처럼, 거친 외양에 숨겨둔 마음이 상상 이상으로 로맨틱한 데 놀란 것뿐이었다.
"또 그런다, 또! 가스나라고 하지 말라니까? 여자 취급하는 거 싫다고!"
"진짜?"
"그래!"
"영 파이가?"
"파이고, 케이크고, 타르트에 슈크림이야!"
"알았다. 앞으로 내 여자 취급 안 할게. 됐나?"
"그래 됐……. 응?"
1년여 만에 받아낸 항복 선언인데 경상도 사투리 특유의 생략 많은 어법 때문에 뒷맛이 찝찌름했다. 내가 멈칫하는 사이 너는 은근슬쩍 옆자리로 옮겨 앉아 내 어깨를 감쌌다.
“잠깐, 잠깐! '내'의 뜻이 '내가'야, '나의'야? 어느 쪽이야?”
"니 정말 후회 안 하제?"
"아니, 그러니까 그 '내'가 무슨 뜻이냐고!"
"나중에 꼬롬해가 울지나 마라, 알았나?"
"너, 너 이씨......!!!"
약이 올라 바들바들 떠는 게 재미있는지 너는 무뚝뚝한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가득 채웠다. 어째 나이가 들더니 능글능글해졌어, 옛날엔 그렇게 귀여웠는데. 품으로 끌어당기는 팔을 튕겨내고 사이를 띄웠다. 입술을 한 발 내밀고 다시 반성문이랄까, 연애편지를 읽는 척하자 너는 잠시 내 안색을 살피다가 머쓱한지 뒷머리를 긁으며 일어나 휘적휘적 어디론가 걸어 나갔다. 연애편지가 안 먹혔으니까 꽃이라도 사오려는 걸까? 로맨스에 있어서는 왕도를 걷는 편이니 역시 장미를 사오려나, 빨간 장미는 너무 클래식해서 싫은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다만 부분을 찾았다. 우리 처음 만난 그 순간을 아직 기억할까, 라니. 그런 멍청한 질문이 어디 있어? 그렇게 말도 안 되게 내 인생에 뛰어들어놓고선. 편지 속 네 회상을 따라서 그 때의 기억을 나도 하나하나 돌이켜 본다. 우리 처음 만난 그 순간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
인파를 헤치고 내 인생에 무작정 뛰어든 남자는 끈적하게 들러붙는 손길들 속에서 무작정 나를 끄집어내었다. 길거리에 내던지듯 손목을 놓아주고 너는 화를 가라앉히듯 후우, 숨을 골랐다.
- 니.
으르렁거리는 듯한 저음과 억센 말투에 나는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또 무엇을 잘못 했을까,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비웃음 사고 조리돌림 당했을까. 이 사람은 무슨 이유로 나를 미워하게 되었을까. 알코올로 닦아낸 과거의 언젠가, 또 스스로를 염가 판매했던 것일까. 나를 꿰뚫는 새카만 눈동자가 두려워 마른침을 삼켰다. 너는 천천히 입술을 열어 담배연기와 같이, 한 마디 물음을 내보냈다.
- 괜찮나?
괜찮냐니, 뭐가 말이야?
전혀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언제 봤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네가 나를 언제 봤다고, 나를 다 안다는 듯이. 나는 괜찮단 말이야. 정말인데, 나 정말 괜찮은데, 나는 언제나 괜찮은데, 괜찮았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잔뜩이었으나 연기 탓인지 목이 매캐해서 그만 반문을 할 수가 없었다. 네가 담배를 너무 뻑뻑 피워댔기 때문에 눈이 아파서 눈물도 날 것 같았다. 담배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우와앙, 결국 어린 애처럼 울음을 터뜨리자 너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사나웠던 첫인상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다정함으로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나를 끌어안고는 힘들었제, 내 안다, 이제 괜찮다, 되는대로 위로의 말을 주워섬겼다. 내 눈물로 어깨가 젖거나 말거나 토닥토닥 등을 쓸어주며 아기처럼 어르고 달래는 중에도, 내게 담뱃재가 튈까봐 한 손은 길게 뻗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땐 어쩐지 웃음이 나서 끅끅거리며 울다 말고 딸꾹질까지 했더랬다.
- 진짜 죽고 싶어…….
네 덕에 겨우 울음을 멈추고 훌쩍이며 나시 밑단으로 눈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을 닦았다. 배가 훌렁 드러나는 동시에 너는 뒤를 돌았다. 남들보다 뾰족하게 솟은 귀끝이 빨개서 나는 또 웃었다. 네가 일찌감치 돌아선 덕분에 울다 웃다 하느라 이상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이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 그라지 마라. 이쁘고 어린 아가 와 그라노?
- 나 같은 거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 누가 신경을 안 쓰는데.
- 그럼 누가 신경 쓰는데?
- 아, 내가 쓴다, 내가 쓴다고!
너는 나를 달래느라 한 모금 밖에 못 빨고 꽁초가 되어버린 담배를 발밑으로 던져버렸다. 행동거지며 말투에 진하게 짜증이 묻어났지만 아무리 인상을 찌푸려도 나는 더 이상 네가 무섭지 않았다. 왜애?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너는 눈을 피하며 새 담배를 뒤적거렸지만 나오라는 담배는 안 나오고 은박지만 헤지고 있었다.
- 그……. 이래 알았는데 칵 디지삐믄 기분 졸라 드릅다 아이가. 니 좋다고 이라는 거 아이니까 오해하지 마라!
- 나 안 좋아? 싫어……?
- 안 싫다, 안 싫으니까 고마 울어라. 내 머리 아플라칸다."
얼굴을 찡그리고 부러 목소리를 떨자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까봐 안절부절 못 하는 네 모습에, 아무리 우는 척할래도 눈물은 쏙 들어가고 웃음만 나왔다. 거짓말처럼 배실배실 웃는 날 보고 너는 어이가 없다고 혀를 내둘렀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기만 했다.
- 너 디게 귀엽다.
- 니 취했네, 정신줄 단디 잡아라.
- 나 안 취했는데?
- 마, 아까 술 졸라 처마시더만.
- 안 취했는데!
- 혀 꼬인다.
- 안 취했어!!!
나는 끝까지 안 취했다고 우겼고 너는 혀를 끌끌 찼다. 그래 니 안 취했다, 술 마시고 취했다고 하는 놈은 그래 한 놈도 없더라. 네가 먼저 백기를 들긴 했지만 나도 내가 취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저 너랑 투닥대는 게 좋았을 뿐. 그래서 네가 새로 문 장초를 중간에 밟아 껐을 때, 네가 가버릴까봐 얼마나 겁을 먹었던지.
- 어디 가?
- 안에.
- 나도.
- 안 된다 니는. 집에나 가라.
- 왜? 나도 더 놀래!
- 안 된다 했다. 그래 취해가 우예 놀라고? 지 몸도 간수 못 하는 기. 위험하게 나대지 말고 집에 가서 발 닦고 자라. 알겠나?
너는 성질을 내면서 나를 큰 길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때쯤 나는 정말로 술이 다 깨어있었는데, 직접 택시를 잡아 문까지 열어주니까 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네 이름도 모르는데.
이름이 뭐야, 그 다섯 글자가 그 때는 그리도 어려웠다. 너의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나의 이름도 알려주어야 한다는 뜻이고, 그 뒤에 따라올 사실도 거짓도 아닌 추문들을 언젠가 네가 알게 될 것이 두려워서……. 이런 나에게도 누군가 그리도 상냥했었다고 추억하고 싶어서. 그렇지만 몸은 떠나도 마음이 네 곁에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지라, 차문을 닫아주고 차가 출발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너를 훔쳐보다가 알았다. 너도, 나를 그냥 보낼 수는 없는 거라고.
- 야!!!
몇 미터쯤 전진한 택시를 멈추고 창문을 내려 빽 소리를 지르니 막 뒤돌았던 네가 멈춰 섰다. 그러니까 봐, 내 목소리를 기다렸잖아. 한 뼘 쯤 창문을 내리고 그 틈새로 눈만 빼꼼 내밀었는데도, 그 멀리서부터 눈을 맞추고 뛰어오는 너 말이야.
- 있잖아.
- 뭔데.
- ……전화……. 해도 돼?
조심스레 묻자 너는 웃었다. 네가 내 손목을 잡고, 달리고, 달래주면서도 짓지 않았던 웃음을, 어설프고 미약하지만 따스한 웃음을.
- ……그래.
그날, 이름표도 달리지 않은 열한 자리의 숫자를 나는 밤새 외웠다. 다음날 네가 먼저 전화해서 최승현 세 글자를 가르쳐줬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권지용? 지용, 권지용. 내 이름을 가르쳐주자 곱씹듯이 몇 번 되풀이해서 불렀을 때, 아, 모든 걱정은 사그라지고 언젠가 들었던 시가 내 마음 속에 피어났다. 네가 나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나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가스나야."
아련한 상념에 푸욱 빠져있던 나를 불러올린 것은 그 놈의 '가스나'였다. 이래서야 내가 꽃이 되려도 되겠니? 이 나쁜 놈.
"왜, 나쁜 새끼야!!"
“아나.”
어디서 주워온 양 무심하게 내민 것은 예쁘게 포장 된 백합이었다. 꽃 사올 줄이야 알고 놀란 척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 종류에 대해서나마 예상을 벗어난 데에 약간 놀랐다. 삐쳤다고 한 번은 튕길 생각이었으나 그 탓에 덥썩 받아서는 향부터 맡아버렸다. 가슴이 푸근해지는 느낌이야.
“백합 이름이 우리말로 뭔지 아나?”
“그래, 난 가방끈 짧아서 그런 거 모른다. 어쩔래?”
“그기 또 와 그래 되노.”
짐짓 삐친 체 했더니 시늉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너는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나를 무릎에 들어 앉혔다. 쀼루퉁하니 튀어나온 입술을 집어넣으려는 듯 톡톡 가볍게 두드리는 손짓에, 한심하지만 나는 또다시 반하고 마는 것이다.
“나리다.”
“나리?”
분명 편지에 나오는 꽃이 나리라 하지 않았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었다. 고개를 돌려 눈을 피하는 걸 쫓아가서 마주보았더니, 너는 곤란해 하다가 아예 내 두 볼을 잡고 입술을 부딪쳤다. 부드럽게 입술을 핥고 조심스레 앞니를 두드린다. 처음처럼, 여전히 간지럽고 풋내 나는 키스.
"사……."
부서지기라도 할까 천천히 떨어져나가서는 무언가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문다.
"아니,"
무슨 말이 그리 어려운지 머뭇머뭇하다가 다 하지도 않은 말을 정정하고는 다시 큼큼, 헛기침을 했다. 아하, 알겠다. 나에게 무척 소중한 말. 그래서 네게 더 어려울 말. 나는 너와 나 사이에 놓인 꽃을 너처럼 끌어안으면서 환하게 웃었다. 네가 말하기 쉽도록 내가 먼저 대답할게. 있잖아, 나도,
"정말로 좋아한다, 니."
***
『 ……(중략)……. 너는 나리꽃이다. 그래, 백합이다. 과거의 누가 너를 얼마나 꺾고 더럽혔든지 너는 아름답다. 아찔하도록 향기롭고 순결하다. 너는 내 마음을 빚어 내게 텅 빈 가슴을 알게 했다. 그리하여 나는 꽃병이 되었다. 그것이 우연이라도 좋다. 이 가슴에 너를 담게 해다오. 네가 나에게 안기는 순간 우연은 운명이 되었다. 오직 너만을 담게 해다오. 나는 너를 위해 놓였음이다.
2014년 9월 7일, 권지용에게, 최승현이.
추신. 화난 건 충분히 잘 알았으니 민소매랑 핫팬츠는 집에서만 입어라. 일이라도 난 싫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