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 정말 그럴 거야?]
승현은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만 쳐다보고 있었다. G의 문자. 이제 T라고 부르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답장도 하지 않고 멍하니 메시지를 보고만 있자 답답했는지 다시 문자가 온다.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승현이 크게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배터리를 분리했다. 이제 마음이 좀 편한 것 같다. 이제 손 뗐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는지. 승현이 흘끔, 휴대전화에 시선을 준다. 이렇게 문자를 계속 씹으면 엄청난 후폭풍이 몰려올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래도 너무하잖아, 여긴 경찰서고 난 이래봬도 형산데. 머릿속이 온통 G로 도배된다. 답답함에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와야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경찰서 문이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최승현 형사님 계세요?”
그 목소리에 승현의 파트너인 유민이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누구지. 유민은 이내 대수롭지 않게 손가락을 들어 승현을 가리켰다.
“최승현 형사요? 저쪽에…”
유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손가락 끝에 걸린, 벌떡 일어선 채 벙 쪄있는 승현을 본 그가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승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식은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다.
“지, 지용아 네가 무슨 일로…”
“무슨 일일까?”
지용이 빙긋 웃으며 승현에게 대답했다. 지용의 미소에 승현의 온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미친놈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승현을 본 지용이 그의 귀에다 속삭였다.
“내가 여기서 T! 한마디만 하면 너랑 나랑 사이좋게 감방 가는 거야.”
지용은 승현의 옆자리에 앉아 승현이 타준 코코아를 홀짝이며 경찰서 내부를 슥 훑어봤다. 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다든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경찰서에서 일하는 승현을 보게 되다니, 뭔가 새로운 기분이었다. 이 자리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데. 지용이 있어서 일하는 척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바쁜 건지 컴퓨터로 뭔가를 바쁘게 하고 있는 승현을 지용이 아래위로 훑었다. 아무리 봐도 진짜 잘났어. 지용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나는 강한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장난스럽게 승현의 볼을 꼬집었다.
“이거 누구 애인인데 이렇게 잘났어?”
“왜이래?”
승현이 화들짝 놀라며 제 볼을 꼬집는 손을 치워낸다. 하여튼 예전엔 물고 빨고 생 지랄을 떨던 게. 지용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승현이 혹시 제가 잘못한 건가 싶어 지용의 손목을 덥석 잡는다.
“이제 와서 왜 이러셔.”
승현의 손을 가볍게 뿌리친 지용이 책상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승현이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예의주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지용이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어, 저기”
서 안의 모든 형사들의 시선이 지용에게로 쏠리고 승현은 불안함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승현이 안되겠다 싶어 지용을 막으려고 벌떡 일어서는 찰나, 지용이 말을 이었다.
“다들 피곤하시죠? 제가 간식 쏠게요.”
친절한 미소를 짓는 지용을 보며 승현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 승현을 본 지용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승현아, 너는 뭐 먹을래?”
“어? 어…비비빅.”
지용이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만들어 보이고는 서 밖으로 나갔다. 지용이 나가자 서 안의 형사들이 승현에게 질문을 쏟아 부었다.
“거 참 착하고 건실한 청년이네. 친구야?”
“네? 네. 뭐, 친구죠.”
“저렇게 착한 놈이 최승현이 같은 놈이랑 친구를 해?”
“아, 형. 알고 보면 저 새끼 성깔 나보다 더해요.”
“그건 모르겠고, 피곤해 죽겠는데 간식만 사 준다면 그 성깔 다 받아줄 수 있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나도’하는 소리에 승현이 머리를 싸맨다. 이 병신들. 그러니까 이때까지 우리를 못 잡은 거 아니야. G&T. 현대판 보니 앤 클라이드라 불리며 서울 시내 은행이란 은행은 다 털어버린 한국 역사상 최고의 은행 털이범. 그들이 홍길동도 아니고 은행을 털어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잠재된 사회에 대한 반항심을 깨워줬다던가, 아무튼 이런 비슷한 이유로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수많은 팬을 보유하게 되었다. 처음 자신들에게 팬이 생겼다는 사실을 안 두 사람은 세상 참 말세야, 하며 혀를 찼지만 G는 종종 팬들을 의식해 튀는 행동을 하곤 했다. 덕분에 골치 아픈 건 역시 T였고. 예전의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지금 두 사람은 갈라선 상태다. G의 갑작스런 은퇴 선언에 T가 이유를 물었지만 G는 ‘재미없어’라는 말로 모든 상황을 일축해버리고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G가 T에게 연락을 하며 다시 은행을 털자는 제안을 해왔다. 함께 은행 털이범으로 활약했던 시절부터 머리 하나는 끝내주게 좋았던 T는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경찰이 되면 혹시 G를 다시 만날까 싶어 공부해 친 경찰 공무원 시험에 덜컥 붙어버렸다. 막상 형사가 되어보니 이거 생각보다 본인에게 잘 맞는 거다. 그렇게 지금은 진짜 경찰이 되어버린 T가 그를 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경찰이 될 일도 없었을 텐데.
-
“커피 드시고 하세요.”
저기서 저렇게 싱글싱글 웃으며 커피 나눠주는 남자가 G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저 커피 사온 돈도 다 옛날에 은행 털었던 돈일 텐데. 승현은 혀를 쯧쯧 차면서도 지용이 내미는 비비빅을 까 입 안에 넣었다. 다들 간식에 눈이 팔려 자신들에게 관심이 없는 틈을 타, 지용이 승현에게 말을 걸었다.
“진짜 안 할 거야? 너무하네. 옛날 애인이 이렇게 까지 예쁜 짓 하면서 부탁하는데.”
“누가 예쁜 짓 하래?”
“와, 매정한 거 봐. T, 나한테 이래도 돼?”
지용의 입에서 튀어나온 T 한 글자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선다. 미쳤냐며 작은 소리로 지용을 윽박지르는데, 유민이 승현을 불렀다.
“네 친구가 사왔는데 너도 먹어라.”
“난 됐어. 많이들 드세요. 어차피 내 돈도 아니고.”
“와 저 새끼 말본새 좀 봐. 지용씨랬나? 저런 친구 둬서 고생이 많네요.”
‘호호호’웃으며 ‘힘들어 죽겠어요.’하는 지용에 승현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포기했다. 지 마음대로 하라지. 승현이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열심히 일하는 척 했다.
“지용씨, 저희 어디서 본 적 있죠?”
“에, 글쎄요. 형 같이 잘생긴 사람을 기억 못할 리가.”
다른 형사들과 이야기하며 웃는 지용에게로 온 신경이 쏠려있다는 사실에 조금 자존심이 상한다. 고작 ‘전’애인일 뿐인데. 어느새 지용이 다시 제 뒤에 와서
서있다.
“에이, 일하는 척 하는 것 봐. 국민들 세금 받고 일하면서 이래도 돼?”
“신경 꺼라.”
“왜, 나도 세금 내. 따지고 보면 내가 너 월급 주는 거네. 어이, 고용인. 열심히 일해야지.”
장난스런 말에도 승현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주위를 한번 둘러본 지용이 승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랑 같이 은행 털자. 다른 애들두 다 기다려.”
이 새끼 진자 작정하고 왔구나. 다른 애들은 언제 다 모은 건지. 승현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마른세수를 한다. 답답함을 감출 수가 없다. 지용이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승현을 보고 있다. 어쩌라는 거야, 그런 눈으로 나를 보면.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근무시간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웬 껌딱지 같은 게 붙어서 졸졸졸 따라온다. 대체 오늘 하루 종일 괴롭혀놓고도 정작 자기는 피곤하지도 않은지 옆에서 쉴 새 없이 입을 놀린다.
“야, 진짜 집 가? 애들 얼굴이라도 보지.”
“왜 그 핑계대고 취중에 약속받아서 녹음이라도 해놓게?”
“어, 들켰다.”
해맑게 웃어재끼는 지용의 얼굴에 승현이 점점 열 받기 시작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아오, 저걸 한 대 칠 수도 없고.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앞만 보고 집으로 가는데, 지용이 갑자기 길 앞을 막아선다.
“뭐야,”
뒷말을 이을 새도 없이 승현의 뒷목을 잡아서 끌어 내린 지용이 승현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부볐다. 그런 지용의 행동에 승현이 픽 웃었다.
“병신아, 아직도 키스 못하네.”
승현이 지용의 양 볼을 잡고 이번에는 제대로 키스했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승현의 혀에 지용이 벅찬 듯 슬쩍 눈을 뜬다. 그런 지용의 눈을 다시 감기고 지용의 입안을 마음껏 헤집는 승현. 아, 이게 몇 년 만이지. 승현의 입술이 떨어짐과 동시에 지용이 거친 숨을 뱉어낸다.
“멍청한 게 키스는 졸라 잘해요.”
“멍청한 게 키스도 못하면서.”
“그래서 더 좋아했잖아.”
아, 말문이 막혀버렸다.
결국 키스 값으로 지용과 녀석들이 살고 있는 집까지 와버렸다. 너무 권지용의 계략대로 움직여 주는 건 아닌가 걱정스럽다.
“오, T! 오랜만이네.”
“어.”
“역시 넌 올 줄 알았어, 인마. 그럼 언제 시작해?”
“T는 안한대.”
신나서 왁자지껄 떠들어 대던 녀석들이 한순간에 조용해진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도 싸한 반응에 승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조용히 앉아있던 혁수가 입을 열었다.
“그럼 가라고 해, 저 새끼. 배신자는 필요 없잖아?”
“내가 와서 애들 얼굴이라도 보고 가라고 했어.”
“그래? 그럼 얼굴 봤으니까 꺼지라고 해.”
매서운 눈빛으로 승현을 쏘아보고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리는 혁수. 다른 녀석들도 어느 정도 그에 동의하는지 지용의 눈치를 살살 살핀다.
“씨발 니들도 마음에 안 들면 꺼지든가 마음대로 해.”
지용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들 방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개새끼들’하고 지용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승현은 묵묵히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새끼들, 성질은. 승현이 지용의 어깨에 손을 얹자, 지용이 탁 쳐낸다.
“네가 안한다고 해서 그렇잖아. 뭐가 문제야? 같이 해! 뭐가 무서운데? 지금 형사짓 해서 벌어먹으니까 네가 진짜 무슨 정의의 사도라도 된 것 같아? 그래봤자 범죄자잖아! 사람도 죽여 봤잖아!”
“닥쳐.”
따지고 보면 다 너 때문이니까. 승현이 뒷말을 속으로 삼켜냈다.
지용은 승현이 떠나고 매정하게 닫혀버린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 왜 잡지 못할까. 문 닫히는 소리가 방 안까지 들린 건지 혁수가 밖으로 나왔다.
“그 새끼 갔냐.”
“응.”
“아직도 걔 좋아하냐?”
“응.”
혁수가 지용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지용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냐 묻는 지용에게 ‘잠깐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하고 대답한 혁수는 집 밖에서 벽에 기대 담배를 태우고 있는 승현과 마주쳤다. 물론 승현이 밖에서 가만히 서 있지 않았더라도 쫓아가 승현을 잡을 생각이었다.
“네가 경찰이라고?”
“……어.”
“세상 말세다.”
승현의 옆에 서 혁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승현이 혁수의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를 멍하니 바라본다.
“진짜 같이 할 생각 없냐.”
“하… 솔직히 말하면, 권지용 얼굴 보는 순간 흔들렸어. 지금 나에게 있는 것들 중에 뭐 하나라도 그 아이보다 소중한 게 있을까. 근데 역시 안 되겠어. 괘씸해서.”
“괘씸해?”
“지가 먼저 도망갔잖아. 안한다며. 재미없다며. 그렇게 나까지 버리고 가놓고서는 왜 이제 와서 지랄이야. 지 같은 애들 잡아 족치면서 잘 살고 있는 사람한테.”
승현이 떨어뜨린 담배꽁초를 발로 밟아 비벼 끈다. ‘간다’하는 승현에게 혁수가 건성으로나마 손을 흔들었다. 새끼, 사정도 모르면서. 승현의 뒷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혁수도 담뱃불을 끄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멍하니 어두운 거실에 혼자 앉아 있는 지용.
“왜 여기서 궁상떨고 있냐.”
“이혁수가 내 애인 쫓아내서.”
“애인은 무슨, 자라.”
-
의외였다. 지용이 다시 연락을 해 올 줄이야. 워낙 자존심이 센 성격이기도 하고 어제 그렇게 싸우고 헤어져서 다시 연락을 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너, 진짜 안 해?]
어쩌면 못 본 사이에 녀석도 많이 변한 걸지도 모르겠다. 녀석의 말마따나 범죄자에 살인까지 저지른 내가 경찰이 되어 살고 있듯이. 녀석도 이만큼, 아니 어쩌면 이보다 더 많이 변했을지도. 안한다는 문자를 보내기가 무섭게 지용에게 답장이 왔다.
[너 없이도 우린 할 거야. 그러면 우린 만나게 되겠지, T.]
무시하려 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새 문자가 도착했다.
[이건 범행 예고야. 정말 내가 미우면 알려도 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꽤나 확고한 자신감이 가득한 메시지. 과연 네가 나를 미워할 수 있을까? 어제도 그렇게 내 키스를 무시할 수 없었으면서. 여유로운 G의 미소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분한 마음에 주먹을 꽉 쥔다. 네가 네 마음대로 떠났던 그때도 지금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시간이 그렇게나 많이 흘렀음에도. 다시 휴대전화가 진동한다.
[혹시 알리고는 싶은데 네 정체가 들킬까봐 겁나?]
곧이어 바로 하나의 문자가 추가로 도착했다.
[G Time. On the TOP.]
당장 지용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집어던지듯 책상 위에 놓았다. 옆에 앉아있던 유민이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어 승현을 쳐다봤다.
“왜 갑자기 신경질이야?”
“잠깐 나갔다 올게요.”
겉옷을 걸쳐 입고 경찰서를 나와 뛰었다. 급하게 택시를 잡아타고 녀석들의 집 앞에 도착했다. 굳게 닫힌 현관문을 있는 힘껏 두드려댔다. 곧 집 안에서 욕설이 들려오고 현관문이 거칠게 열렸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이 G이기를 바랬지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것은 혁수였다.
“권지용…권지용 어디 있어?”
“네가 걜 왜 찾아.”
“어디 있냐고!”
이혁수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멱살이 잡힌 상태에서도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는 그 재수 없는 얼굴에 주먹을 냅다 꽂았다.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안에 있던 녀석들이 하나둘씩 현관에 고개를 내민다. 혁수와 승현을 번갈아 보고 점점 더 험악해지는 얼굴들 사이로 승현은 지용을 찾았다.
“없어, 권지용?”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찾지 마. 이제 그 자식 그만 괴롭혀.”
안에 지용이 없음을 확인한 승현이 자신을 주시하는 녀석들을 뒤로하고 어디론가 달려 나갔다. 시계를 확인했다. 8시. G Time. 18분 남았다. G Time, On the TOP. G Time이 언제인지 내가 모를 리가. 녀석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오후 8시 18분. 내 시간이야. G Time.’
‘왜 하필 오후인 건데?’
‘그냥. 나 아침에는 못 일어나잖냐.’
결국 지용을 찾지 못하고 서로 돌아왔다. 분위기가 어수선 한 게 뭔가 사건이 터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유민이 다가와 승현을 보챘다.
“어디 갔었어?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 갔는데. 얼른 출동 준비해.”
“예? 무슨 일인데요?”
“남산타워, 63빌딩. 각각 4발씩. 총 8발. 사상자 없음. 용의자 도주 중.”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G다. 각각 4발씩 총 8발. G Time, On the TOP. 남산타워와 63빌딩. On the TOP.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건 분명히 G가 남긴 메시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게 G가 남긴 메시지라면 지금 도주 중인 용의자 역시 G. 그를 찾아야 한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용의자 추적 팀에 합류해 그의 뒤를 쫓았다. 그동안 늙지도 않았는지 요리조리 쏙쏙 빠져나가는 지용에 승현은 머리가 아파왔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지용의 뒤를 아직까지도 쫓고 있는 건 승현 혼자뿐이었다. 다른 형사들은 어느새 다 따돌려버린 지용이 막다른 골목 앞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어떻게 보고할지, 잘 생각해 뒀어?”
“……왜 이러는데.”
“할 거라고 했잖아. 내 메시지는 잘 받았어?”
“G Time, On the TOP. 참 높은 곳만 골라서 올라갔드만. 아마도 63빌딩에 올라갔던 건 녀석들 중 하나겠지. 네가 남산타워에 온 건…”
“옛 추억팔이는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눈 깜짝할 사이에 연막탄을 터뜨린 지용이 훌쩍 담을 넘어 사라졌다. 허탈하게 뿌연 연기를 바라보고 있는 승현에게 유민이 다가왔다.
“놓쳤어? 아, 이 새끼. 연막탄까지 갖고 있을 줄이야.”
“…63빌딩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거기는 훨씬 빨리 토꼈어.”
역시. 지용은 나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잡힐 듯 말 듯 한 거리를 유지하며 도주했던 거였다. 아무래도 보고해야겠다. 막아야겠으니까. G가 계속해서 사지로 뛰어드는 것을.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다른 사람을 T의 대역으로 사용하는 건 도저히 배알이 꼴려 못 참겠다. G의 연인인 T의 대역이 왜 필요해. 그냥 사실대로 둘이 갈라 선 걸로 하면 되잖아.
-
“왜 그랬어.”
“뭘.”
“진짜 보고 하면 어쩌려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혁수의 말에 지용의 입에서는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대체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 도대체 이 자식은 모르는 게 뭔가 싶다. 비밀을 만들 수가 없어.
“너네한테는 진짜 미안한데, 그러면 T는 이제 완벽한 자유를 찾을 수 있잖아.”
“너는.”
“나? 나는 원래 천성이 못된 년이라서 괜찮아. T도 내가 꼬셨는데 뭐.”
지용의 미소에 씁쓸함이 묻어난다. 혁수가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혁수를 보고 웃어주는 지용이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만 같아 혁수는 지용의 머리위에 제 손을 턱, 얹었다. 아, 아직 여기 있구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대신 그랬다가 다 같이 잡혀 들어가면 네놈 존나게 저주할거다.”
장난 섞인 혁수의 말에 지용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고맙다, 너무. 이렇게 항상 내 욕심만 채우려 하는 내 곁에 있어줘서. 그래도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이렇게 내 멋대로 결정하는 건. 사실 처음에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줄 알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이런 일이 한 번 더 생겨버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졸라 감동적인 새끼. 니 새끼 저주라면 다 받아줄 수 있어, 인마.
서에 도착하자마자 서장님의 잔소리 융단폭격이 쏟아졌다. 지가 현장 뛰는 것도 아니면서 잔소리는 졸라 많아요. 승현은 서장의 잔소리를 들으며 보고할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8시 18분, 818은 G를 뜻하고, 양쪽에서 4발씩 8발. G와 T가 연인관계임을 과시한다. 자신들의 존재를 여덟 발의 총성으로 알린 것은 범행예고라 볼 수 있다. 답을 알고 있으니 일어난 일과 답 사이의 연관성은 끼워 맞추기만 하면 되니 이건 답지를 보고 문제를 푸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과연 진짜 범행은 언제, 어디서 이루어 질 것인가 하는 것인데 도저히 G의 메시지만으로는 알아낼 수가 없다.
“야, 야! 똑바로 안 듣지, 지금. 어?”
서장의 불호령이 떨어지는 동시에 지용의 문자가 도착했다.
[T Time. G&T, 중간자 H.]
T Time. 오전 11시 4분. 범행 시간을 알리는 메시지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H? H라면 이혁수. G와 T의 중간자라. 혁수가 중간에서 신경을 많이 써주기는 했다. 그게 대체 범행 장소와는 무슨 관계일까. T Time이 범행 시간이니 그 뒷말은 분명히 장소와 관계가 있을 텐데. 다시 한 번 서장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최승현! 정신 안 차려?”
“저, 서장님. 얘가 눈앞에서 용의자를 놓쳐서 충격이 컸나본데…”
“충격은 무슨 충격! 야 이 새끼들아, 놓쳤으니까 범인 안 잡을 거야?”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아무래도 생산성 따위는 약에 쓸래도 없는 서장의 잔소리만 듣고 있어야 할 것이 뻔하니 일단 보고부터 하고 봐야겠다. 드디어 결심한 승현이 입을 열었다.
“저, 서장님. 저 범인이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이 새끼가 말대꾸를…… 뭐라고?”
“범인은 G&T일 겁니다.”
승현이 잔소리를 듣는 내내 머릿속으로 정리했던 내용을 차근차근 입 밖으로 꺼냈다.
“이번 범행시각인 오후 8시 18분은 G를 뜻합니다. 그러니 다음 범행 시간은 T Time, 오전 11시 4분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승현의 말을 찬찬히 들은 서장이 납득이 가지 않는 표정으로 승현에게 되물었다.
“그래. 범행 시간은 11시 04분이다, 그거지? 그럼 범행 장소는?”
“그게, 그건 잘…….”
“이 새끼가… 지금 당장 그 잘난 대갈빡 굴려서 장소 알아와! 나머지도 내일 11시 4분까지 범인을 잡아 오든지 범행 장소를 알아오든지 해! 알았어?”
승현이 자리로 돌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중간자 H. H. H라. 홍대? 한옥마을? 한양대? H라고 했는데 한옥마을은 좀 아닌가. 혹시 남산타워처럼 지용과의 추억이 있는 곳은 아닐까. 아, 머리야. 잠이나 한 숨 잤으면 좋겠는데.
유민이 조심스럽게 서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하는 소리에 문을 연 유민이 곧장 서장이 앉아있는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어, 그래. 낌새가 있었나?”
“……예. 오늘 총기 발사 사건이 생기기 약 한 시간 전 쯤 불안한 모습으로 휴대전화를 확인하더니 뛰쳐나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덤덤한 유민의 말에 서장이 흥미롭다는 듯 상체를 숙여 유민이 서 있는 쪽으로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그래서, 휴대전화는 확인해 봤나?”
“예. 확인해 봤는데 다른 문자는 다 지운 듯 해 보였고 G에게서 도착한 단 하나의 문자만 남아 있었습니다.”
“내용은?”
“G Time. On the TOP."
승현의 보고를 들었을 때부터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그게 모두 G에게서 전해들은 내용이라. 게다가 G에게 범행 예고를 미리 받았음에도 미리 보고하지 않았고, 저 문자가 범행 예고인지 몰랐다고 하더라도 승현의 보고에는 G에게 받은 문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아무래도 최승현이 T가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
유민은 그저 멍하니 책상위에 올려져 있는 화려함을 뽐내며 번쩍이고 있는 서장의 볼펜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임무를 맡았을 때부터 어리둥절했었다. ‘T일지도 모르니 잘 감시하라.’ 설마 진짜로 증거 비슷한 것을 발견하게 될 줄이야. 유민이 처음 본 승현은 어리숙하고 어딘가 조금 모자란 듯한 젊은 청년이었다. 사회 초년생인 그를 경찰에서 주시하고 있다는 게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 유명한 ‘T'일지도 모른다니. 승현과 함께 한지도 수년이다. 함께 한 시간동안 단 한 번도 서장을 찾아와 승현의 수상한 행동을 보고하게 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금방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겠지 싶었는데.
“아, T Time?”
“예?”
“최승현이가 아까 보고 할 때, T Time이라고 하지 않았나? 혹시 모르니 휴대폰 다시 한 번 확인해 봐.”
유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장실을 나왔다. 오늘도 밤 시간에는 항상 들리는 난동부리는 취객과 형사의 말다툼소리가 시끄럽다. 한숨을 쉬며 앞머리를 거칠게 뒤로 쓸어 넘겼다. 뭐야 저 새끼. 진짜 T야? 복도 의자에 앉은 유민이 벽에 머리를 기대고 오늘 승현의 행동을 되짚어봤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제부터 조금 이상했던 것도 같다. 휴대전화를 보면서 식은땀을 흘리더니 아예 배터리를 분리해 버리고.
“…설마.”
오늘 승현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확인한 승현의 휴대전화에 남아있던 문자. G Time. On the TOP. 승현이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서에서 대기했다 뒤늦게 출발하게 되어 짜증이 나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 때 그렇게 뛰쳐나가서 총기 발사를 한 후 서로 돌아온 걸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으아아아…”
이제 모르겠다. 내가 최승현이 착한 놈인지 나쁜 놈인지 판단해서 뭐 해. 시키는 대로 보고나 해야지.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승현이 눈에 들어온다. 이 병신 새끼. 지가 T면 휴대폰 관리정도는 제대로 해야 되는 거 아냐? 승현의 이런 행동은 보면 볼수록 그가 T일 리 없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이렇게 경찰서에서 편하게 잠이나 자고 있는 게 진짜 T일 리가. 어쨌든 유민은 서장이 시킨 대로 승현의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1개의 새 메시지’
유민이 고개를 들어 승현을 살폈다. 여전히 곯아 떨어져 있다.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내일 봐, 내 사랑.]
유민이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그 파열음에 승현이 잠에서 깼다.
“형? …뭐해요?”
“어? 야, 폰을 이렇게 바깥쪽에 놔두면 어떡해? 지나가다 떨어뜨렸잖아.”
유민이 휴대전화를 주워 승현에게 내밀었다. 새카만 액정. 승현이 휴대전화 전원 버튼을 꾹 눌러보지만 켜지지 않는다.
“아씨, 뭐야. 형 때문에 고장 났네. 형이 사 줄 거예요?”
“야 인마. 지가 끄트머리에 올려놓고 누구보고 사달래? 염치없는 놈.”
“끄트머리에 안 올려놓은 것 같은데…….”
“뭐?”
“아니에요.”
승현의 혼잣말에 괜히 찔려 과민반응 해 버렸다. 어쨌든 승현은 믿는 눈치다. ‘내 사랑’이라니. 그렇다면 승현이 진짜 T라는 말일까. 이 사실을 서장에게 알리면 승현은 어떻게 되는 걸까. 누구보다 임무 수행에 열심이던 승현이었다. 그런 승현이 정말 T……?
-
“왜 청승이야?”
어두운 거실 구석에 쪼그려 앉아 멍하니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는 지용에게 혁수가 다가갔다. 지용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지용이 승현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가 띄워져 있다.
“다 끝내려니까 힘드냐?”
“……응.”
녀석들 중 하나를 경찰서로 보내 동태를 살피게 했다. 녀석의 말에 지용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경찰 지금 난리 났어. 내일 오전 11시 4분에 G&T가 범행을 저지를 거라고. 아직 범행 장소는 어딘지 모르는 것 같아.’
결국 승현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함께 하지 않겠다는, 완벽한 거절. 얼마 전 승현과 했던 키스가 떠올라 지용이 괜히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하나도 안 변한 줄 알았다. 내가 승현을 아직도 사랑하듯이 승현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역시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사라진 건 미움 받기에 충분했나보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승현이만 자유로울 수 있으면…”
“이번엔 진짜 금방 못나와. 다 늙어서 나와야 될지도 몰라.”
“응. 알고 있어.”
부서질 듯한 지용의 미소에 혁수가 인상을 찌푸린다. 최승현, 독한 새끼. 과연 지용이 왜 자신을 떠났었는지 알게 되더라도 이렇게 행동할까. 가정은 필요 없다. 내일 오전 11시 4분, 한국은행에서 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것이 현실. 상처를 받더라도 그 시간 이후로 모든 게 끝난다. 엄청난 명성의 G&T도, 우리 모두에게 내리 꽂히는 의심의 시선들도. 다른 점이 있다면 지용과 혁수에게 꽂히던 의심은 확신으로, 승현에게 꽂히던 의심은 동료 간의 굳은 신뢰로 변할 것이라는 점.
-오전 11시.
“아직도 범행 장소 어딘지 못 알아냈어?”
“죄송합니다.”
남은 시간은 고작 4분. 대체 중간자 H가 뭔데. 머릿속이 터질 것 같다. G와의 추억과 각종 단서들, G의 메시지가 엉킨 털실뭉치처럼 한데 뒤섞여 머릿속을 굴러다닌다. 뭔가 하나만 잘 풀어내면 몽땅 분해되어 깔끔하게 정리될 것 같은데.
-오전 11시 01분.
대체 그 하나가 뭔지 도저히 모르겠다. 벌써 1분이 흘렀다. 차근차근 생각해보기로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노름판에서 빚을 잔뜩 떠안고 있는 내게 G가 다가왔다.
“너 돈 없지?”
“왜, 돈 좀 주게?”
“나도 돈 없어. 그러니까 같이 돈 가지러 가자. 널린 게 은행이야.”
무슨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나 싶었다. 사실 G를 욕할 처지는 아니었다. 나도 충분히 미쳐있었으니까. G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보니 앤 클라이드 같은 희대의 은행털이범이 되자’하며 계획을 세우던 중, 집으로 사채업자들이 찾아왔다.
당시 기억은 온통 새빨갛다. 사채업자들 중 하나가 G의 머리채를 잡았고, 나는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마침 옆에 있던 건, 깨진 벽돌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오전 11시 02분.
그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때 G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뭔가 말 했던 것 같은데.
“너 나 좋아하지?”
아니야. 좋아하는 건 맞는데 지금 필요한 건 이 말이 아니다.
“이리 와, 내가 키스해줄게.”
지용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겹쳐졌다. 그리고 그렇게 입술을 맞대고만 있었다. 하여튼 키스는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지.
아니, 이게 아니라. 그래 G와의 키스도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필요한 조각은 이게 아니라니까. 그래, 범행 장소를 고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냥 작은 은행 털자니까?”
“싫어. 멋있게 하자. 멋있게.”
그래, 이 부분인 것 같은데.
-오전 11시 03분.
“뭐가 멋있는데?”
“음……한국에서 제일 좋은 은행 정도는 돼야 내가 털만하지 않겠어?”
“제일 좋은 은행?”
그래, 분명히 ‘제일 좋은 은행’이라고 했다. 근데 결국 우리가 처음 털었던 건 그냥 작은 은행이었는데. 그리고 지용이 털어보려 했던 그 은행은 끝까지 가보지 못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더 생각해 내면.
“응. 한국은행? 한국은행 좋다. 중앙은행이잖아? 돈 만드는 은행이고! 완벽하네!”
중간자 H. 한국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 풀렸다.
-오전 11시 04분.
“지금 한국은행에 은행 강도가 들었답니다!”
“G&T야?”
“확실하진 않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아, 늦었다.
-
“떨리냐?”
혁수의 물음에 지용이 생긋 웃었다.
“떨리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어? 그나저나 T는 결국 G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나봐.”
“니 메시지는 너무 억지잖냐.”
“하긴. 그건 그래.”
지용이 유유히 한국은행의 내부를 둘러본다. 들어왔을 때는 사람이 북적북적 했는데 지금은 다 도망치고 없다. 사실 은행털이를 쉽게 하려면 인질은 필수지만 오늘의 목적은 은행털이가 아니니까. 여기서 돈을 만든다는 말이지. 그놈의 돈, 돈, 돈. 더러운 돈. 더럽지만 더러워서 나와 승현이를 만나게 해준 돈.
“돈 찍어내는 기계 하나만 가져가면 진짜 좋겠다.”
“바보냐.”
씩 웃은 지용이 눈앞에 보이는 입금전표에다 글씨를 휘갈겨 쓴다. ‘Bye, G&T.’ 지용이 전표를 두 번 접어 손에 꼭 쥐고는 혁수에게로 다가갔다.
“그럼 이제 돈지랄 좀 해볼까.”
금고에서 꺼내온 어마어마한 양의 돈뭉치. G가 그 중 하나를 쥐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나머지 돈더미에 녀석들이 기름을 붓는다. 지용이 혁수와 녀석들을 둘러보며 씩 웃는다. 녀석들도 지용을 보며 환하게 웃어준다. 지용이 불붙은 돈뭉치를 기름을 잔뜩 덮어쓴 돈더미에 던져 넣었다. 순식간에 타오르는 돈. 이렇게 돈에 미련 없이 살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승현이도 못 만났으려나. 지용이 손에 꼭 쥐고 있던 입금전표를 타오르는 돈더미 안으로 던졌다. 새빨간 불을 아련한 눈으로 쳐다보는 지용을 혁수가 끌고 은행 문을 열어 밖으로 나왔다. 은행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경찰들이 입구로 다가섰다.
“이, 이게 뭐야?”
문이 열리자마자 빠져나가는 연기에 경찰들의 시야가 가려졌다. 그 틈을 타 도망치는 혁수와 지용. 지용을 발견한 승현이 지용을 잡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승현의 곁을 지키던 유민도 승현이 뛰자 덩달아 뛰었다. 승현을 쫓아가며 유민이 서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최승현과 함께 범인 추적중입니다.”
지용이 달리며 흘끗 뒤를 쳐다봤다. 열심히 제 뒤를 쫓아오는 승현.
“혁수야, 나 최승현이랑 둘이 잠깐 얘기 좀 해도 되겠냐?”
“그래. 나중에 보자.”
골목에서 양쪽으로 갈라지는 두 사람. 당연히 지용의 뒤를 쫓는 승현에 잠시 고민하던 유민이 결국 혁수의 뒤를 쫓았다. 한참을 달리다 사람 없는 한적한 골목에 도착하자 지용이 달리기를 멈췄다.
“결국 알렸더라.”
“왜 이래. 이제 돈도 많잖아. 나랑 가자. 응?”
“알잖아, 나 욕심 많은 거.”
뜻을 굽히지 않는 지용에 승현이 떨리는 손으로 총구를 지용에게 겨눈다. 그런 승현의 행동에도 전혀 긴장하는 티를 내지 않는 지용. 멀리서 경찰차 소리가 들려왔다. 승현의 손바닥에서는 땀이 잔뜩 배어난다. 승현은 흥건한 땀을 바지에 슥 닦아내고 다시 한 번 총을 단단히 고쳐 잡았다.
“승현아, 그거 알아?”
“뭐.”
“나 너 사랑해. 아직도.”
떨리는 지용의 목소리. 지용이 자신에게도 은행털이범 생활에도 질려서 자신을 떠난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승현에게 지용의 말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자연스레 팔에 힘이 풀려 승현의 손에 들린 총은 더 이상 지용을 겨누지 못했다.
“뭐? 그럼 왜…”
“그러니까 네가 나 잡아가.”
그때 경찰차가 도착했다. 지용의 몸이 작게 떨렸다. 경찰차 문이 열리고 안에서 서장과 유민이 내렸다. 유민은 승현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바닥으로 푹 숙이고 있었다.
“얼른 체포해.”
유민이 조금씩 승현에게로 다가가자 지용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지용의 눈동자를 본 서장이 웃으며 유민을 저지했다.
“너희 둘이 진짜 G&T야. 그렇지?”
자신이 의심받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던 승현이 놀란 눈으로 서장과 지용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에 반해 지용은 전혀 놀라지 않고 서장을 노려봤다.
“무슨 헛소리야. 지금 내 애인 저렇게 경찰차 안에 처박아 놓고.”
“그래? 아니란 말이지. 그럼 최승현, 체포해.”
“예?”
“예는 무슨 예야. 얼른 체포해.”
승현이 어쩔 줄 모르고 주춤주춤 지용에게 다가갔다. 절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아직까지도 사랑한다는 지용의 말은 대체 뭐고 서장은 왜 저를 T라고 의심하고 있는 건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얼른 수갑 채워.”
지금 여기서 G를 체포해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렇게 지용과 혁수가 G&T가 되는 건가. ‘나 너 사랑해.’하는 지용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승현이 지용의 손목을 잡았다.
“아직 사랑한다는 거, 진짜야?”
“……아니. 그러니까 얼른 체포해.”
거짓말. 왜인지는 몰라도 너는 지금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내가 너를 체포해 서로 연행하도록. 그리고 나는 예전부터 네 말을 잘 듣지 않았잖아. 게다가 네 말마따나 어차피 사람 죽이는 거, 처음도 아니잖아?
승현이 몸을 돌려 망설이지 않고 정확하게 서장을 쏘았다. 경찰 내에서도 사격을 잘하기로 소문난 승현이었지만 현장에서 본 그의 솜씨는 정말 대단했다. 유민이 놀라 멍하니 승현을 보고 있는데, 승현의 총구가 이번에는 유민을 겨누었다.
“형, 어떻게 알았어요?”
“…널 감시하는 게 내 임무였어.”
둔기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했다. 충격에 말도 잇지 못하는 승현과는 대조적으로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는 지용에게 승현이 물었다.
“나 의심 받는 거… 알고 있었냐?”
“……응.”
“너…설마…그래서…….”
“너한테는 의심이었지만 나한테 꽂힌 의심은 거의 확신이었어. 너 대신 혁수랑 잠깐 감방 들어갔다 나왔지. 모방범인 척 해서. 그게 최선이었어.”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는 지용에 할 말을 잃은 승현 대신 유민이 무릎을 탁, 치며 입을 열었다.
“아, 어디서 봤다 했더니.”
“그때 서에 계셨나보네.”
“G&T인 줄 알고 들여다봤는데 모방범이래서. 근데 그게 진짜였을 줄이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승현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다. 지용이 ‘재미없다’며 사라진 이유가 정말 질려서 사라졌던 게 아니라…
승현이 떨리는 손으로 유민에게 총구를 들이밀었다. 승현의 눈빛에 놀란 유민이 승현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는 동안 지용은 경찰차 문을 열고 혁수를 꺼내줬다. 쓰러져 있는 서장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 지용이 수갑을 풀었다. 총성을 듣고 출동한 건지 멀지만 사방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이혁수, 먼저 가.”
“미쳤냐?”
“다 같이 잡혀 들어가면 나 평생 저주한다며. 저주하지 말고 얼른 가버려.”
“니네 둘만 잡혀 들어가도 존나 저주할거야. 집에서 보자.”
발소리가 점점 다가오는 듯 했다. 혁수가 주머니에서 연막탄을 꺼내 터뜨렸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지용이 승현을 찾아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도망가는 법, 까먹은 거 아니지?”
“당연하지.”
웃으며 말하는 지용을 본 승현이 덩달아 씩 웃으며 대답했다. 승현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 모두 달리기 시작했다. 승현은 뭔가 아련히 G와 함께 했던 옛 추억이 떠오르는 듯 했지만 지금은 옛 추억이나 떠올릴 아름다운 상황이 아니었다.
“씨발.”
어디서들 튀어나온 건지 어느새 경찰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뭐야, 최승현?”
승현을 보고 형사들이 당황한 사이 지용이 승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알지? 포위당했을 땐 정면 돌파야.”
작게 ‘하나, 둘, 셋.’하고 센 지용이 승현의 손을 잡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나오자 지용이 뒤돌아 경찰의 상태를 확인했다. 미친 듯이 뒤를 쫓아오는 형사들. 달리면 달릴수록 점점 벌어지는 격차에 G와 T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지었다.
“T, 졸라 사랑해!!”
“나도 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