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늘고 하얀 다리가 공중에서 흔들렸다. 노을아래 하이얗게 타오르던 다리는 내 눈앞에서 흔들리며 심장과 함께 뛰어나갔다. 마침내 돌아보던 그 눈망울에 나는 울룩불룩 솟아났으며 찔끔 솟은 눈물에 코끝까지 아렸다. 그 뒷모습에 아연해진 내가 뻗으려던 손을 긴 팔이 파르르 떨며 막아섰다. 하양 빨강 하양 빨강. 교차하는 두 색과 두 기로에서 찢어지는 기계음이 울렸다.
- 위이이이이잉!
내게 남겨진 경박하고 진중한 경고음은 내게 말했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붉게 터져나가는 슬픔과 흔들리는 시야에 나는 깨달았다. 온통 나를 품던 그 것들은. 결론적으로 그런 것이었다. 나에게 사랑이란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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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를 만난 건 초등학교 교직 생활 7년째 였던 해였다.
난 서른일곱으로 늘구죽죽한 나이를 맞아서야 교직 생활의 일곱 번째 해를 맞았다. 일 년 재수한데다 4년제 졸업 후 임용고시에 목메었고, 마지막으로 2년이란 시간을 군대에서 삽질하느라 보낸 게 그 이유였다. 내가 늦은 것도 아니지. 나는 언제나 당당한 자기 위안을 하고는 했는데 그 내용은 부모의 바램을 위한 재수와, 수도권을 향한 삼년의 노고였으며, 남자로써의 삶을 얻기 위한 명예로운 허송세월이었단 말이었다. 그리하여 얻게 된 철밥통에 얼굴을 묻고 산지도 어언 칠 년. 그 사이에 나는 건실한 청년에서 건실한 노총각이 되었고 매년 시골에 내려갈 때마다 우려의 목소리는 가족을 포함한 일가친척의 타박으로 변질 되었다.
"읏따 써 묵으라고 그렇게 묵혀두고 살아 살기를, 이제 느이 동생이 애 낳고 국민학교도 보냈는디. 엄마는 다 필요없어. 얼른 장가나 가서 니랑 똑 닮은 최씨, 아새끼 안아보는게 소원이여."
"엄마…. 나 별로 늦은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지금 교제하는 여자도 없고……. 내가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니가 모자란 게 무어가 있어서 그르냐 그르길, 중매장이 데려다 결혼시키면 요즘 시대가 어떻고 저떻고……. 이것아 느이 아범하고도 맞선으로 만났당께!"
"아, 알았어! 엄마가 그렇게 원하는 참한 아가씨 데려오면 되잖아."
"엔간하면 전문직이라도 일 있는 여자여야 혀…."
"알았다고-"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시집온 엄마의 느리고 껄쩍찌근한 전라도와 충청도의 애매한 사투리는 기가 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결국은 맘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여자를 찾겠노라한 선언. 이번에도 장가갈 아가씨를 안 데려오면 호적에서 판다느니 만다느니…….,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재미나다며 말하고 있는 게 밉살맞았다. 아마 내 첫사랑 이야기 한 번만 해도 호적에서 까일 인생이었지만 알아서 무덤을 팔만큼 나는 아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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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사랑은 빳빳하고 청결한 흰 와이셔츠와 옅은 풋내로 기억하고 있다. '남자'란 소재로 하얀 얼굴과 가는 팔다리는 나를 숨 막히게 했으며 조곤조곤한 말투와 꽃이 만개하듯 마냥 피었던 웃음은 나를 설레게 했다. 공부도 중상위권이었고 리더십도 있어서 반장도 했었다. 종알종알 이러자 저러자, 고놈의 짜증까지도 당찬 것이 매력이었다고.
다만 여즉까지도 아쉬운 점은 난 그에게 단 한 번도 호감을 표해봤던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굉장히 하찮은 것이었는데 그 애에게 품었던 짝사랑의 인식이 졸업한 뒤 두어 달이 지났을 쯤에야 되었다는 비애 덕분이었다. 그 내용도 다른 것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징그러웠다.
내용인즉, 정신없이 재수학원을 다녀도 남은 시간이 많았던 이유였을까 그 한적했던 어느 날 서늘한 오후에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 결국 잠에 들어버렸다. 한동안 문제집을 풀어야한다는 강박이 꿈속까지 나를 쥐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이 지나자 수면 속 환상은 나를 재수생이 아닌 고등학생으로의 역행을 시켜 버렸다. 학생이 된 나는 땀내 나는 체육복을 입고 모래밭만 같은 운동장에 서 있었다. 그 곳 한켠에서 내 첫사랑이었던 그 애가 나를 향해 웃었다. 도근도근하고 심장이 뛰는 것이 목젖까지 느껴져서 나는 손바닥을 그러모아 쥐어야만 했다. 나를 향해 웃은 것인지 혹은 나를 포함한 집단에게 웃은 것인지 애매하여 감사보다 비참함을 느꼈는데, 그 것을 느끼고 자시고 할 새도 없었다. 그 애는 그리 웃더니 여름날의 수도꼭지 아래에서 물방울을 튀기여 달려들었다.
꿈에서 흠뻑 젖은 나는 일어나서도 그대로여서……. 난 그자체로 서러워져 울었던 아래와 같이 눈물을 흘렸다. 혼자 트렁크 팬티를 빨던 신세보다 이제야 그 것을 알아서 어떤 것도 그 애에게 전하지 못하고 내 감정이 죽어간 것이 억울했다. 마치 열매가 떨어져 밟은 후에야 한때 달려 있었음을 깨달은 궁색한 농부 같았다. 축축이 젖은 팬티만이 감정의 유품으로 남아 날 오래간 괴롭게 했으며, 그 잔상은 몇 년이고 내게 상처였다. 이제야 잊었다고 생각했었고, 이제는 묵혀놓고도 혼자의 비밀로써 소담한 안줏거리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지난 지가 십 년하고도 일곱 고개가 더한 후인 지금에야 또 다시 내 첫사랑과 같은 누군가를 만났다. 그 눈과 풋내 음을 가졌으나 그보다도 순결하고 미숙한 작은 아이. 그 아이를 만난 것은 운명이었으나 그와 동시에 매 분 매 초가, 나의 존재가, 혹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고통이었다. 감정에 꽃이 피어나고 열매가 맺혔고 그게 썩어 떨어지도록 몰랐던 처음. 차라리 몰랐다면 하고 꼬인 인생을 잇새로 씹어보았다가도, 결국에는. 그 얼굴을 못 볼 바에야 질게 발아래로 늘어진 전신의 둔통을 참기로 했다. 처음부터 내도록 두려운 이름, 목구멍 아래로 구겨 넣던가 혀 밖으로 내뱉어 떨어져도. 그렇게도 아쉬운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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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씨……. 없는 일이라도 만들어 피하고자 한 것은 나의 판단 착오였다. 차라리 음악선생과 밥한 그릇 얻어먹고 면구스런 얼굴로 후에 맞선이라도 볼 것이라며 여차저차 거짓말을 할 것을 그랬다. 열중을 다한다며 눈 돌린 아이들 일기와 자잘한 숙제들을 너무 사력을 다해 본 모양이었다. 초저녁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열심히 하네, 최 선생? 젊어서 좋아. 난 먼저 갑니다."
"네, 네! 조심히 살펴가세요."
"내가 문제겠어? 최 선생 같은 사람 밤길에 가다가 잘생겼다고 누가 해코지라도 하는 거 아냐?"
깔깔깔, 위와 같이 내가 열중을 다해 종이 쪼가리들에 코박은 그 새에 다른 선생들은 자리를 뜬 지 오래였고, 오십대 중반의 여선생이 경박한 말투로 그런 주절거림만 놓고 갔다.
"슬슬 쌀쌀해지네."
곧 있으면 추석인데. 것도 참. 저번 명절에 했던 선언을 지키지 못했단 이유로 또 온갖 잡소리를 들을 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덜컹덜컹, 가까운 언덕배기에 위치한 낡은 기차가 철도 위를 뛰는 소리가 요란했다. 늙은 쇳소리는 저녁이라는 고즈넉한 매개체에 녹아들어 사라지고, 지는 하늘에는 붉게 어지러지는 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늦었다고 해도 일곱 시하고 몇 분뿐인데 벌써 어둠이 내리는 것에 새삼 지금이 계절의 이름 없는 간이역임을 느꼈다. 그것을 느끼다가도 금세 입에서는 불퉁히 말이 입안에서 굴렀다.
"잔디 깐다더니, 빨리 좀 깔지."
푸석푸석한 모래가 모처럼 샀던 구두에 들어가자 절로 불평이 나왔다. 밑창으로 모래 알갱이들을 차며 정신없이 걷다가 눈을 들었을 때에 나는 운동장에 나만이 있는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저녁 먹을 시간, 학원갈 시간에 남은 아이가 없을 텐데도, 그나마 논다하는 아이들은 학교에 남아있지도 않을 것을. 그럼에도 들리는 명량하고 외로운 목소리는 내 귀를 관통하듯 스쳤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
노을과, 일곱 시 몇 분이었던 시간, 내가 가졌던 불만까지 모든 것을 등지고 철봉에 위에 걸터앉아 부르는 노래였다. 하얀 다리가 기다란 쇠붙이 아래로 드리워져 흔들렸다. 신이 났는지 제 혼자 아슬히 매달려 흔들리는 데,
-칙, 폭, 칙칙 폭폭
읊어내는 노랫말에 박자를 달리하며 같이 도근도근. 마치 첫사랑의 향을 폐 속 가득히 품은 것 마냥, 두근거렸다. 그 기현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나는 목젖으로 침만 삼키며 놀라야했다. 주먹만 한 근육주머니의 간헐적으로 시작된 급작스런 경련은 멈추지 않고, 근육이 수축하고 팽창하고를 반복했다. 그것은 본능적인 두려움이었을까? 첫사랑의 감정과 이 두려움이 같았더라도 어쩌면 그것은 한 면으로 상통하는 것이 있었다. 어찌하였건 간에 벌써부터 짝사랑으로 끝날 것을 예감한 것이나, 혹은 내가 사랑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감정을 가진 존재는 언제나 사회적 잣대에서 넘어선 것들뿐이라는 것이었다. 온몸이 황홀하게 뛰어노는 와중에 달큰하고 씁쓸한 것을 깨달아 버린 속이 타올랐다.
"아……."
탄성과 같은 한마디가 입에 퍼지고 손에 들고 있던 지저분한 공책들이 푸석푸석한 모랫길에 퍼졌다. 아둔한 내 단말마에 노래는 끊기고 호기심가득한 눈만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동그란 얼굴에 자리한 이목구비는 나를 향해 물음표를 던졌다. 그에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재간도 없이 멍청하게 말했다.
"아….안녕?"
그러자 아이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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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안녕?
-안녕하세요오
-이름이 뭐야? 난 여기 학교 선생님이야. 어, 일학년 가르치고 있어.
-지용이에요. 권지용!
-지용이구나…. 이름 귀엽다. 어…. 선생님은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아….잘 가요…. 응
아이의 이름은 지용이었다. 동그랗고 하얀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아니 얼굴보다도 존재의 유무를 가렸을 때부터 나의 눈은 이미 흐려져있었다.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떠나왔다. 다시 보고 싶어. 볼 수 있을까. 아니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좋을까?
더 이상 감정이 커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마치 잭의 콩나무 처럼 아이를 보자마자 씨를 뿌려 싹이 돋은 내가 빠른 시일 내로 이 감정을 베어버리길 원했다. 어린왕자가 바오밥나무가 자라기 전에 뽑아야 한다고 하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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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또다시 제자리걸음이었다. 또 핑계만 가득 대고 그 시간을 기다렸다. 좀 더 일찍 나가고 싶지도, 그렇다고 늦게 가고 싶지도 않았다. 만분의 일로 잠깐 만났더라도 괜한 희망에 속만 타는 결과라도. 로또를 사는 아저씨 같단 생각이 조금 들었다.
"안녕?"
여전히 아이는 마치 어제처럼 그 모양 그대로 언덕배기를 바라보며 철봉위에 살풋이 앉아있었다. 작은 등허리를 보며 나는 일생일대의 결심이라도 한 듯 침을 한가득 삼키고, 겨우 인사 한번 했다.
"안녕하세요?"
"지용이라구 했었지?"
"응 권지용이에요."
허무하게도 첫 마디 이후로는 뭐라 물을 재간도 없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지용이마저도 그 후로는 아무 말도 없이 거꾸로 매달린 채 나를 봤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살며시 웃더니 한다는 말이,
"거꾸로 보니까 선생님 얼굴 웃겨요."
"나도 지용이 얼굴 웃겨."
어제 선생님이라고 알려준걸 까먹지 않고 있었는지 선생님이라며 말하는 것에 속이 근질근질 했다. 지용이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한 바퀴를 돌아 철봉에서 내려왔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얼굴이 발그랗게 상기되어 작은 손으로 꼼지락 댔다. 작은 손가락이 내 가슴을 간질이는 듯 눈을 다시 위로 올렸다. 발걸음이 곰실곰실 모래밭에 자리한 지용이의 곁으로 다가섰다. 작은 머리통이 보여 손을 올리려다가, 포기 했다.
"으응, 선생님은 이름이 뭐예요?"
"최승현이야. 여기 학교 다니니?"
"응! 삼 학년이에요. 열 살 됐어요."
나랑 스물일곱 살 차이가 났다. 실제로 보자면 내 아들내미라고 해도 믿을 나이였다. 나는 괜히 의기소침했으나, 여전히 옅은 갈색의 눈을 빛내며 바라보는 아이에게 나에게서 벗어나 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막상 다가간 것은 나였다. 모순을 느끼면서 나는 괜한 죄악감에 집이라는 매개체를 꺼내왔다.
"그렇구나 나중에라두 보면 좋겠다. 선생님 먼저 갈게. 집에 가는 게 좋지 않아? 부모님 걱정하실라."
"아녜요. 아빠는 일하러 나가셨구, 엄마는 집나갔어요. 동네 할무니가 그랬어요."
"아……."
"그럼 밥이랑 옷 같은 건 어떻게 해?"
"밥 할 줄 알아요, 그리구우 할무니가 많이 가져다 줘요. 옷두 할머니가 빨아주고……. 응. 가끔 아빠도 오는걸!"
"그렇구나. 지용이 장하네……."
한마디로, 기차 다니는 언덕배기에 사는 아이란 말이었다. 방음벽도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은 그 동네. 먼 거리라고 생각되는 초등학교에서도 덜컹거리는 소음이 지나고는 했다. 화물기차인지라 더욱더 무식하게 달리는 것이 지용이의 집주위에 있단 것에 대해 불안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지용이는 기차길옆 오막살이 노래를 부르는 거야?"
"엄마가 애기때 자장가로 불러줬었어요."
이 아이는 어찌하여 어떤 두려움도 없이 내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지. 마치 맑은 물속을 들여 보듯 순식간에 집안 사정과 아이 내면의 외로움마저도 알아버린 나는 더욱더 죄짐만 가득 진 채로, 웃어야 했다. 그에 대해 알았다는 성취감이 전사하는 군인의 모르핀처럼 작용했을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근데 간다고 했잖아요."
"응 그랬지. 그럼, 갈게 지용아."
"……선생님!"
"왜?"
돌아보는 곳에 지용이가 서있었다. 괜히 속 알맹이가 툭 떨구어 지듯 했다.
"나 맨날 여기서 놀아요. 애들 가구 나면 나밖에 없어요."
"……지용이, 선생님 내일도 보고 싶어?"
"혼자서 놀면 부끄러워요."
"그래 알았어. 내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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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으로써 염치가 없게도 난 약속을 지키 않았다. 그 날 이후로 아이를 보지 않았다.
분명 지용이가 말한 뜻에는 내일도 만나서 놀자는 거겠지만서도. 나는 그것에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있는 초등학교 3학년이 아니었으며, 동성애자와 아동성애자가 의심되는 삼십대 후반 아저씨였다. 그것도 공무원이라는 사람이, 더 이상 알고 싶지도 그만큼 길러나가기도 싫었다.
여러 미사여구와 추잡스런 생각으로 버티었는데. 그랬는데 추석이라고 있는 휴일에 학교마당에 내가 있었다.
역시 없구나. 그때에 꼬질 하게 운동장 외곽에 앉아 모래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지용이는, 그새 나를 봤는지 쪼르르 달려 나와 숨을 헉헉 였다.
"오, 오랜만이에요."
"응. 선생님이…바빠서……."
"선생님 저랑 놀아요. 추석이라구 다들 어디갔어요. 아빠는 오늘도 안 왔는데……."
내 옷을 작은 손이 쥐었다. 긴장해서 뒷덜미가 단단해졌는데 그것도 모르고 지용이는 좋다고 웃었다.
"잘 지냈어?"
옷에 묻은 모래가 신경 쓰였지만 지용이의 몸을 털어줄 수는 없었다. 모래는 상관치 않듯 지용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오물거렸다.
"별루……. 친구들 가고도 선생님 기다렸는데 없어서 혼자 노래만 불렀어요."
"심심했겠구나."
"응, 그러니까 나랑 놀아주세요.
"그럼 술래잡기나 할까? 지용아."
놀이라고는 생각난 것이 술래잡기밖에 없었다. 순간적인 생각에 뱉은 말이었으나 지용이의 반응은 마치 순식간에 꽃이 만개하듯 이를 희게 드러내며 웃는 것이었다. 작게 젖살로 부푼 볼에 작은 점이 귀여웠다. 끌어안고 싶어. 문득 든 생각이었다.
"선생님은 지용이보다 빠르니까 백까지 세주세요."
"백?"
"언덕 쪽으로 갈 거예요."
"왜?"
"우리 집에 가까우니까."
왜라는 말에는 네가 갈 곳을 왜 알려 주냐는 뜻이 있었지만 지용이는 다른 의도로 해석한 듯 했다. 어긋났지만 나는 그 대답으로 만족했다.
하나, 둘, 셋-…….
"……칠십 칠, 칠십 팔, 칠십 구, 팔십!"
지용이가 새마냥 키득거리며 웃더니 포로롱 뛰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점점 초조해진 내가 결국 백을 세지 않고 팔십부터 눈을 떠버렸다. 그리고 사라진 지용이에 놀란 나머지, 팔십 일부터 생략을 감행하고 뛰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보이는 작은 뒤통수에 나는 도망가 버리는 규칙이 당연한 것인데도 원망스러워 졌다. 이대로 잃어버리면 어쩌지? 잃어버린다는 동사에 목적어가 없었다. 내 의지를 말하는 것인지 지용이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 이러다간 잃어버리겠다.
작은 상가들이 지나고 아파트단지도 스쳤다. 횡단보도는 이리저리 살피더니 그냥 무단으로 건너버리더라. "지용아 안전을 지켜야지!" "선생님도 그냥 건넜잖아요―"
지용아- 지용아,
"지용아!"
"대답 안 해줄거에요!"
까르르르, 뭐가 좋다고 전신으로 웃으며 달려 나가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차가 달리고, 사람이 지나갔다. 멀어진 거리는 좁혀지는 듯 하다가 언덕배기를 다가서니 길을 모르는 내가 더 이상 가까워지지가 않았다.
하얀 다리가 달리고 내 심장도 뛰었다. 지용이는 멈추지 않고 작은 다람쥐마냥 시커멓게 멍든 장난감집 같은 판자촌을 뒤적이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지용아, 지용아.
이번에는 불러도 무대답을 통보하지도 않았다. 한두 번은 시선이라도 주는 듯 하더니 이제는 돌아보지도 않고. 이유를 알수 없는 끈질긴 의지였다.
"언제까지 안 잡히면 네가 이기니?!"
"내가 집에 가면 내가 이겨요!"
이제야 제일 중요한 룰을 정했다. 게다가 대답도 그제야 받았다. 지용이는 점점 힘이 풀리는 지 다리가 느려졌지만 나또한 느려진지 오래였다. 하늘이 점차 노을에 물들고 있었다.
"너네 집이 어딘데!"
"철도를 넘으면 있어요."
지용이는 달음박질을 잘했다. 학교에서 이 솜씨로 운동회에서 일등도장도 꽤나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뒤통수와 작은 등판이 얇고 짧은 팔다리에 펄럭였다. 잡힐 듯 잡히지가 않고, 가까워지면 또 이 레이스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 눈에서 지용이가 벗어날까 두려웠다.
그때에 돌이 잔뜩 깔린 길이 달리는 길옆에 마치 작은 돌담처럼 나타났다. 쇠도장이 꾹 찍힌 듯 깔린 철도를 넘으려면 그 둔덕을 올라야 할 것이다. 짐작만 했다. 지용이가 까르르 웃기에 그냥 이번에는 잡아버려야지 하는 맘이 들었다. 돌부리에 엎어질 뻔 하자 아예 마음이 굳었다. 잡을 수 있다는 능력의 논증도 없으면서 괜히 당연히 될 것이라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리고 나타난 건널목이 보이자 지용이는 시멘트 계단으로 뛰어올랐다.
"뭐야!"
지용이가 내 불평 섞인 한마디에 그제서야 돌아서서 베시시 웃더니, 건널목으로 넘어섰다. 나는 너무나 가까워서 금방 잡을 줄 알았다. 손끝으로 지용이 머리카락이 스쳤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 그때에,
위이이이이이이이잉---!
경고음이 울렸다. 놀란 내가 팔을 접자 긴팔이 나를 가로 막아섰다. 파르르 떨며 하양과 빨강을 좌우했다. 덜컹덜컹-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내게 남겨진 경박하고 진중한 경고음은 내게 말했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쌩하니 달려 나가니 흔들리는 시야에 나는 깨달았다. 온통 너를 향해 내가 품었던 그 것들은. 결론적으로 그런 것이었다. 나에게 사랑이란 게…….
그 어떤 것으로도 가로 막히는 것이었다. 주춤하며 다리가 흔들렸다. 뒷걸음질 두 번 이후에 기차가 지나갔다.
지용이가 반대편에서 서있었다. 흐려진 눈동자에서 지용이가 노래를 부르는 게 보였다. 지용이가 응어리져 아래로 흐르고 내가 마침내 건널목을 넘어갔다. 지용이가 나를 달래려 했는지 웃으며 노래를 불렀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 칙, 폭. 칙 칙 폭폭."
"지용아,"
"응?"
"선생님이 지용이를-"
좋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