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용아.”
“응?”
“만약 우리… 정말 만약에…”
“만약에 뭐?”
“만약 더 이상 우리가 함께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떨 거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글쎄… 그런 상황 자체가 상상이 안 간다. 그리고 그런 건 별로 생각해보고 싶지도 않고.”
어쩌면 그는 그 때부터 나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째깍째깍. 툭툭. 나는 새 하얀 거실을 메우는 시계 초침 소리와 엇갈리게 엄지손톱으로 약지 손톱을 툭툭 튕겼다. 아이보리 색 패브릭의 작은 소파 위에 다리를 세워 앉아 툭툭 튕기고 있는 손의 끝을 초점 없이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져 튕기는 손가락의 속도를 빨리하다 그대로 입에 가져갔다. 바삭 깎인 짧고 뭉툭한 손톱은 더 이상 자를 길이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나의 습관적 행동으로 인해, 날카로운 이는 살이 맞닿은 부분까지 더욱 더 깎아 내려갔다. 나는 결국 따끔한 아픔을 느끼고 피를 보이고 나서야 그 행동을 멈추었다. 피가 나는 약지의 손끝을 엄지로 쓱 매만지고 그 손을 반대편 어깨에 얹혔다. 자연히 무릎에 놓여 진 팔에 턱을 괴고 꼭 닫힌 하얀 방문을 고개 돌려 보았다.
‘… 우리 그만 할까?’
약 5분 전,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는 그 말을 뱉는 내 입술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느릿한 시선으로 내 눈을 마주쳐왔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의 눈은 분명히 내게 말하고 있었다.
진심이야?
그 의미를 알아차린 나는 고개를 아래위로 두 번 끄덕였다. 늘 날이 선 듯 보이는 짙은 눈동자는 금세 눈물에 푹 젖어 애처로운 눈으로 내 눈을 마주쳐 왔다. 한 손을 들어 차갑게 식은 내 뺨을 감싸더니 길쭉한 엄지로 몇 번 내 볼을 쓰다듬고서는 굳게 닫은 그 입술을 열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그래, 그러자…….’
-
손잡이가 돌아가는 인기척이 들리자 나는 방문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음소거 된 채 화려한 색을 뿜어 되는 티비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커다란 짐 가방을 들고 나를 지나쳐 현관문으로 향했다. 일부러 지나가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목구멍을 꽉 메우는 울음을 참느라 윗니로 아랫입술을 꾹 누르고 계속해서 어지러운 티비 속 화면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자연스레 눈은 그의 눈동자와 같이 짙은 검은 코트 끝자락을 부여잡았다. 걸어 나가던 그의 발걸음이 멈추더니 나를 향해 뒤돌아서자 코트 끝자락을 부여잡던 시선을 재빨리 다시 티비로 옮겨갔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한참 동안이나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야하나 말아야하나 초조한 마음으로 고민하다 결국 고개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용아.”
낮게 펴져 나가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자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 전율로 인해 아주 찰나로 눈을 감았다 떴지만 마치 영겁의 세월이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사뿐히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얼굴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머플러를 가져가 그의 목에 단단히 둘러주었다. 코트에 뭍은 먼지를 털기 위해 몇 번 어깨와 가슴 쪽을 툭툭 털어주는데 그 손을 슬며시 그가 잡아왔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의 왼쪽에 내려진 짐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슬며시 손을 끌어당겨 나를 꼭 끌어안았다. 시원한 향수의 향이 훅 끼쳐왔다. 나는 눈을 감고 그의 품에서 좀 더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향수 냄새 아래에 숨겨진 그의 체향을 맡기 위해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향수에 가려진 그를 찾기 위해 여러 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다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듯이 들어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자 슬며시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자 나는 이러다가 모든 것을 망치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눈을 떠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지어지지 않는 미소를 억지로 보이며 그에게 인사했다.
“잘 가.”
내 표정을 보고 잠시 일그러지던 그의 얼굴이 다시 펴지더니 잔뜩 굳어 보이는 얇은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걸쳐졌다. 그리고 그도 내게 인사를 했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인지, 작별 인사를 하고도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메마른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긴 한숨을 뱉고 옆에 내려둔 가방을 꽉 쥐고 뒤돌아서 문을 나섰다.
쾅. 두꺼운 철문이 닫혔다. 오롯이 한 사람의 숨소리가 겨울의 메마르고 날카로운 햇빛이 가득한 거실을 가득 메웠다. 단 한 사람의 온기가 사라졌을 뿐인데 나는 강한 추위를 느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 속에 서있으면서도 나는 너무 추워 양팔로 두 어깨를 감싸 안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텅 빈 거실이 메마른 황무지처럼 느껴졌다.
-
일주일 전이었다. 이상하게 한 달 전쯤부터 우리 사이에 이상한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그는 나와 점점 멀어지더니 나를 떨어뜨려 놓고 그냥 그 무엇도 아닌 것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외박하는 날도 많아 졌고, 술에 취해 오는 날이면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이의 이름을 부른다거나, 그 이름의 주인공인 것일지도 모르는, 그의 품에 낯선 이의 향수 냄새는 나를 점점 더 힘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술에 취하면 부르던 그 이름, 그의 품에서 나던 그 향. 그 모든 것의 주인공인 그녀의 존재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회사의 새 프로젝트로 야근이라던 날. 퇴근해 집에 돌아오지 않고 회사 숙직실에서 잘 테니 걱정 말라기에 그냥 그렇구나하고 홀로 그 긴 긴 밤을 지새웠던 날. 그는 회사가 아닌 그 여자의 집에 있었다. 아무 것도 몰랐던 나는 다음 날, 아무래도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회사에 찾아 가겠다고 전화를 했다. 허나 전화기 너머에는 그의 목소리가 아닌 생 전 처음 들어보는 미성의 여자였다.
“최승현 씨 휴대폰 아닌가요?”
-안녕하세요, 지용 씨죠?
“누구시죠? 왜 형 폰을…”
-승현 씨가 어제 집에 두고 갔거든요. 일단 만나죠. 휴대폰도 돌려 드려야하고 제 소개도 하고 말이죠.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아무리 우리가 세상에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랑을 하지만 그래도 내가 분명 그의 애인이고 그녀는 내게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 할 위치이면서도 너무나 당당했다. 내가 오히려 목소리가 다 떨려왔다. 분명 우리 사랑에서는 내가 당당한 위치임에도, 하나도 꿀릴 거 없음에도 손이 떨려오고 목이 탔고 다리엔 힘이 풀려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 나는 왜 그녀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카페 안을 들어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아, 저 여자구나.’ 하고 느낌이 왔다. 그녀는 정말 미인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생머리에 하얀 얼굴,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예쁘게 자리 잡고 있었고 모든 남자들의 시선을 끌만한 좋은 몸매도 가졌다. 그녀의 외형을 보자마자 나는 가슴이 한번 철렁이었고 그녀의 옆에 선 그를 상상하니 온몸이 찌릿했다. 잘 어울렸다. 분명.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지만, 분명 잘생긴 그와 예쁜 그녀는 모두의 시선을 이끄는, 모두의 축복을 받을 선남선녀임에 틀림없었다. 한 없이 그와 그녀를 생각하고 나를 저울질하며 나락으로 빠져들 때 그녀는 어느새 내 앞에 와 있었다.
“권지용 씨. 맞으시죠?”
-
“승현 씨랑 나 사이. 대충 짐작 하시죠?”
“…….”
“글쎄, 보통 다른 사람 같으면 그러겠죠? 미안하다고. 그 사람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면 헤어져 달라고. 그런데 전 지용 씨한테 하나도 안 미안해요. 왠지 알아요?”
왜 일까. 아무 말도 못 하고 나는 그저 멍하니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왜 일까. 그녀는 왜 내게 미안하지도 않고 그렇게 당당한 걸까. 나는 그 물음 보다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다른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녀에게도 그랬을까? 그녀의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사랑한다고 말했을까. 세상에서 네가 제일 예쁘다고, 사랑스럽다고, 너뿐이라고. 너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고. 이 목숨 다 받쳐 사랑하겠다고. 내 눈을 바라보며 내 손등에 입을 맞추고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내 입술에 입을 맞추며 그랬던 것처럼 당신은 내 눈 앞에 있는 그녀에게 똑같이 그런 말을 했을까?
“지금은 지용 씨랑 승현 씨가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랑 승현 씨가 사랑하고 있거든요. 오히려 방해하고 있는 건 지용 씨예요. 지용 씨가 오히려 나한테 사과해야하는 상황이라구요.”
“이봐요, 당신… 왜 그렇게, 왜 그렇게 당당한 거야? 우리 사이에 끼어든 건 당신이잖아. 우린 잘 지내고 있었는데, 사랑하고 있는데, 왜, 왜 당신이…”
“밀려난 건 당신이에요. 승현 씨, 나한테 안 가도록 잘 붙잡고 있지 그랬어요? 내가 잘 사랑하고 있는 둘 사이에 끼어들었어도 지용 씨가 승현 씨 나한테 눈길 안 돌리게, 나한테 오지 않게 잘 하지 그랬어요? 승현 씨가 내게 온 건 지용 씨가 질려서가 아닐까하고 생각해보진 않았어요? 이렇게 된 건 거의 지용 씨 탓이란 거, 몰라요?”
“마, 말이 좀 심하시네. 당, 당신이 우리 사이를 얼마나 안다고… 그 사람 어제도, 분명 어제도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이라고!”
“그 정도 연기는 필요하죠. 바람필 땐. 누구나 할 수 있는 본능적인 연기라구요, 그건. 빨리 헤어져달란 말 안 할게요. 계속 승현 씨 붙들고 있어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지용 씬, 그런 승현 씨랑 같이 잘 살 수 있겠어요? 우리 이렇게 만난 거 승현 씨한텐 말하지 말죠. 그게 지용 씨한텐 더 좋겠죠? 아직 내 존재를 모르는 거면 승현 씨와 좀 더 오래 지낼 수 있을 테니까. 먼저 일어날게요. 아, 그리고 휴대폰은 내가 전해 줄게요. 그럼.”
이 말을 마치고 그녀는 아주 예쁜 미소로 나를 보며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하고 시원하게 자리에서 일어서 나갔다. 온 몸이 긴장을 했었는지 그녀가 나가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대자 어깨가 욱씬 아팠다. 우습게도 그 사람 때문에 이런 상황을 맞이했지만 순간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
“나왔어.”
그녀가 나와 만났다는 걸 말했을까? 아, 그녀가 나와 만났다는 걸 비밀로 하겠다고 말했으니까 그럼 어제 외박을 했기 때문일까. 오늘은 평소 퇴근시간에 맞춰 집으로 온 듯 그는 7시쯤 되어서 집에 조용히 들어왔다. 나는 조용히 소파에 앉아 그의 인사에 대꾸도 하지 않고 그가 있는 곳과 반대인 베란다 창 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그대로 멍하니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있었다. 창에 비친 그는 그런 나를 한 번 쓱 훑어보고 방으로 들어 가버렸다.
“하아…….”
깊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분명 평소와 다른 나임을 느꼈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한 번 쳐다보고 매정하게 방으로 들어 가버리는 그를 원망하고 싶었지만 원망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원망보다는 궁금증이 생겼다. 언제 내가 싫증난 거니?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샤워까지 말끔히 끝내고 나서야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내가 앉은 옆 자리에 앉아 리모컨을 들고 티비를 켰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한 번 쳐다보고 다리를 들어 올려 웅크려 앉았다. 그는 아무 말 없는 내가 진짜로 이상하지 않은 건지 평소처럼 아니, 평소에는 이렇게 조용한 나에게 분명 무슨 일이 있냐며 물었을 것이다. 그럼 평소와 다르다고 표현해야할까. 아무튼 아무 의미 없이 채널만 바꾸어댔다.
물어보고 싶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건지. 무엇이 그를 힘들게 만들어 우리가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그가 무엇 때문에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에게 내 눈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내가 우는지조차 모르는 듯 계속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다 티비를 꺼버리고 수건은 소파에 내팽겨 둔 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옆에 놓여 진 수건은 바라보았다. 볼품없이 휙 하고 던져진 채 덩그러니 소파 구석에 박힌 수건은 어찌 나를 보는 것만 같아서 더욱 더 슬퍼져 눈물을 더 쏟아냈다.
-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다음 날이 된 상태였다. 잠들기 전, 내 마지막 기억에는 내가 거실에서 울고 있었는데, 울다 지쳐 잠든 건지 잠에서 깨고 의식이 돌아왔을 때 푹신하게 느껴지는 내 등 뒤의 감촉과 이불 냄새가 나를 진정시켜주었다. 그가 침실로 옮겼나……? 잠에서 막 깨고 의식이 돌아왔음에도 막 여러 가지의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차근차근 어제 일을 돌이켜 보다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내 옆자리를 확인했지만 역시나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리고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벽에 걸려 진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아침 먹고 나갔을까?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침실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했을 때, 분명 어제는 없었던 설거지 거리들이 있을 걸 보니 아침은 먹고 간듯했다. 걱정했던 마음이 놓이고 나는 바로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했다.
나는 딱히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학에서 작곡공부를 했었고 여러 군데에서 스카웃 같은 것도 왔었다. 그래서 아는 형이 있는 회사에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내가 쓴 곡을 보여주면 그 곡을 받는 사람이나 회사 사장이 어떠한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면 곡을 쓴 작곡가와 함께 의논을 하여 변경할 사항은 변경하고 그대로 둘 부분은 두고 해야 할 일을 정작 그 곡의 작곡가는 빼두고 다른 수석 작곡가와 그 일을 하고 정작 작곡한 나를 쩌리 취급하였다. 눈앞에서 내 곡이 수없이 망치질 당하고 세상에 빛을 발하는 것을 보았다. 단독 작곡이 아닌 공동 작곡으로. 결국 나는 한 달도 못가 일을 때려치우고 간간이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받은 일들만 하곤 했다. 그래서 늘 집에 있는 시간이 허다했고 결국 그와 같이 살게 되면서는 직장을 다니는 그를 대신 내가 당연히 집안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왔기에 이젠 어느 가정주부 못지않게 집안일을 잘 해낸다.
나는 집안일을 하는 것이 좋았다. 기쁜 일이 있든 슬픈 일이 있든, 집안일을 할 때만큼은 아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또 집안일이라는 게 당최 끝이 안 보이는 것이기에,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날이면 늘 대청소를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잠깐이라도 집안일로 그 복잡한 생각을 잠시 접어 두려했으나, 이번 일을 집안일로도 소용이 없는 것인가 보다. 자꾸 설거지하다가 문득 가만히 넋을 놓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쏴아 하고 물줄기가 내 먹먹한 심정을 대신 해 울어주는 것 같아서였을 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설거지를 끝냈는지 모르겠다. 부엌을 나와서 환기 좀 시킬 겸 베란다 문을 활짝 열었다. 날씨가 많이 포근해졌다. 그저께 눈이 엄청나게 쏟아져 내리고 난 후에 하늘은 나 몰라라 하는 듯 깨끗한 하늘에 조금은 거친 햇빛을 걸어두었다. 나는 베란다로 나가 밖을 내다보았다. 간간히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지나가는 아주머니들의 얘기소리. 늘 평소와 다른 게 없는데, 어찌나 내 몸은 누군가가 누르는 듯 힘에 겨운지…….
무언가 이 상태로 두기에는 불안했다. 이렇게 침묵하며 그를 지켜보고만 있기에는 나는 이미 지쳐있는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그를 붙잡아 두고 물어보고 싶다. 내가 아닌 그녀를 정말 사랑하는 지, 언제부터였는지, 정말 나와 그만두고 싶은 것인지. 나는 그를 놓아주고 싶지 않다. 그를 내게서 떨어뜨리고 그녀에게 보내주기엔 내가 너무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자신을 놓아 달라 애걸복걸해도 나는 그를 놓아주기 싫다. 그가 행복하길 바라지만 그의 행복보다는 내가 먼저였다. 나의 행복이 더 먼저인 것이다. 어쩌면 그게 나와 그녀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가 나를 이렇게 버려두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가 행복하길 바라지만 그 것보다도 내 행복이 먼저인, 이기적인 나의 모습에 어쩌면 그가 질려버렸을지도.
결국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을 쥐고 있었던 건지 옆에 두고 있었던 건지 통화 연결 음이 흐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의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려봤다.
-여보세요?
“형, 오늘 마치고 집에 바로 올 거지?”
-어, 그게, 오늘 나 회식 있는데… 좀 늦을 거 같아.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회식, 빠질 수 없는 자리야?”
-응, 좀… 그러네…….
“그래?”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고 있어.
“그래…….”
피하는 것일까? 그는 내가 그에게 그녀의 정체를 물을까봐 겁이 난 것일까? 무엇이 겁나는 거지?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한다면 내가 헤어지자는 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피하는 것일까? 그럼 그에게는 좋은 일일 텐데……. 아님, 내가 남 주기는 아깝고 자신이 갖기에는 그런… 계륵(鷄肋)인건가? 그래서 자꾸만 피하는 걸까?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그런 감정으로 나를 묶어두고 있는 것인가? 끊임없이 물고 늘어지는 물음들은 자꾸 나를 심연으로 가라앉혔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7일간의 출장으로 짐을 싼 채 나에게 잘 지내라는 말만 두고 떠나버렸다. 마치 그 작별인사는 영원의 작별을 의미하는 것만 같아 나를 끝도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게 만들었다.
*
“다녀왔어.”
일주일 만이었다. 큰 캐리어를 끌고 현관에 들어서는 그를 바라보았다. 일이 많이 힘든 것이었을까. 어느새 얼굴이 반쪽이 되었고 얼굴이 조금 창백해보였다. 그가 없는 7일이라는 시간 동안 많이 고민했었다. 그가 돌아오면 그녀에 대해 물어볼까? 뭐라고 물어보지? 그럼 타이밍은? 언제 물어봐야하는 거지? 일단 물었다고 가정하자. 그가 그녀의 존재에 대해 긍정을 한다면, 나는 그에게 뭐라 말해야 할까? 또는 부정을 하고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나는 그에게 뭐라 말해야 할까? 아님, 아예 나를 피하려나? 그런 고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를 더욱 더 지치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정면 돌파를 시도하기로 결정하고 그가 오기를 하루하루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 온 그의 모습을 보고는 나의 계획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바깥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았나? 아님, 일이 많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이었을까? 나는 또 어느새 그를 한없이 걱정하고 있었다. 역시나, 나는 그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그가 내려둔 캐리어를 이끌고 조용히 거실에서 짐들을 정리하려고 캐리어 속, 옷들을 꺼내 놓았다. 그는 신발을 벗고 들어 와서 가만히 짐 정리하는 나를 그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쳐다보지 않고 계속 짐 정리를 하면서 무뚝뚝하게 ‘왜?’라고 물었다. 그제 서야 그는 발을 움직여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바로 내 뒤편의 소파에 앉았다. 계속 겉옷과 속옷 등 구분을 하며 정리하는 데, 힘이 없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아무 것도 안 물어봐?”
“……. 뭐가?”
“…….”
“…….”
“알잖아. 내가 뭘 묻는 건지.”
나는 옷을 정리하던 손을 멈춰 옷을 바닥에 내려 두고 상체만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담겨져 있지 않는 그의 눈동자가 없던 기운마저 빠지게 만들었다. 나는 아예 몸을 틀어 그를 마주 보고 앉았고, 그는 시선 한 번 피하지 않고 계속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물어 주길 바라는 거야?”
“…….”
아무런 대답 없이 내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니 점점 숨이 막혀오는 것 같다. 더 이상의 나에 대한 애정이라곤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눈동자란……. 내가, 내가 이 사람과 더 이상 어떡해야 좋을지 정말 모르겠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결국 바싹 말라오는 입술을 혀끝으로 한번 축이고 슬며시 입을 열었다.
“형, 바람 펴?”
“…….”
“대답해. 이 질문 받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지용아.”
“형이 그 여자를 사랑하든 안하든 난 절대 형 못 놔.”
“지용아.”
“형이 내 앞에서 그 여자와 함께 울고불고 매달리며 형을 놓아 달라고 무릎 꿇고 손이 닳도록 싹싹 빌어도 난 절대 형 못 놔.”
나의 단호한 말에 그는 그의 커다란 한 손으로 눈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그 자세로 있더니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조금 붉게 충혈 된 눈을 다시 나의 눈과 마주하며 조금은 주저하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지용아……. 넌, 넌… 날 아직도 사랑하니?”
“……. 무슨 말이 그래?! 지금 나한테 형을 사랑 하냐고 묻는 거야? 응? 그런 거야?!”
“…….”
“그럼 형은, 형은 날 사랑 안한다는 거야, 뭐야? 왜 말을 그딴 식으로 해!!”
“지용아.”
넌 날 아직도 사랑하니? 이 말 한마디에 나는 속이 뒤틀렸다. 무언가 울컥하고 속이 더부룩했고 당장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를 붙잡고 모든 걸 토해내고 싶었다. 나는 손이 새하얗게 질리고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아랫입술을 윗니로 꾹 누르며 속에서 일어나는 뒤틀림을 꾹 참았다. 그로 인해 붉어진 내 눈은 형을 한번 매섭게 노려보는 데, 갑자기 꾹 참던 뒤틀림이 더욱 격해졌고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뛰어가 변기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나의 돌발 행동에 그도 놀란 것인지 나의 뒤를 따라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먹은 것도 없어서 계속 묽은 위액만 나왔지만 구역질은 멈추질 못했다. 나는 구역질을 하는 이 순간에도 이런 생각을 했다. 차라리 이 구역질로 형에 대한 감정을 모두 토해내 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러면 좀 더 편해지지 않을까? 구역질이 멈추고 한동안 일어서지도 못하고 멍하니 주저앉은 나를, 그는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일으켜서 나의 입을 헹구게 하려는지 세면대로 이끌자 나는 그의 손길을 쳐내고 직접 발을 옮겨 세면대로 가 입을 헹궜다. 치이익하고 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잠그고 대충 소매로 입가를 닦은 후 옆에서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형을 보며 한마디 던졌다.
“다시 말하지만, 난 형 절대 못 놔.”
-
그렇게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와 나 사이에는 전혀 변한 게 없었다. 그 시간동안에도 여전히 그녀와 만나는 것인지 그는 주말에는 늘 외출을 했었다. 내가 어디에 가냐고 물으면 ‘바람 쐬러.’ 라며 아주 간단하게 대답하고 내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휙 나가버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집에 홀로 남겨진 나는 그의 행동 때문에 여러 번 내 심장은 난도질당했고 난 또 자기위로하며 그 상처를 꿰매어 갔다. 외사랑은 정말 피를 토해낼 것만 같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렇게 고통을 받는 것은 나인데 이상하게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가는 것은 내가 아닌 그였다. 그토록 내 존재가 그에겐 독이 되는 것일까. 정말 하루하루 사는 게 지옥 같다는 표현이 절실하게 와 닿았다. 서로가 서로를 보는 것이 괴로워 같은 공간에서도 서로 외면하려 애를 썼고 필요이상의 말은 줄였다. 그러니 더욱이 이곳이 사람 사는 집이 맞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안의 음울한 기운은 쉽게 떨쳐내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모든 상황을 한 방에 날려버린 일이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작업 의뢰를 받아 미팅 때문에 낮에 잠시 외출했다가 조금 늦은 오후에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집 안 쪽에서 무슨 말하는 소리가 웅웅 들려왔고 현관에는 오늘 아침에 그가 신고 간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져 있었다. 아직 퇴근하기엔 많이 이른 시간이어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조심스레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전화를 하는 지 안 방 침실에서 그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평소 같으면 그의 통화 내용이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 얘기거나 친구와의 가벼운 수다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미치도록 궁금했다. 과연 전화의 상대는 누구이며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가 된 기분이었다. 열고 싶어. 듣고 싶어. 한참을 방문 앞에서 망설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려 문을 아주 살짝 열었다.
“응. 응. 아, 오혜인, 진짜 몇 번을 말해. 그랬다니까. … 응. 똑같아. 별로 나랑 헤어질 생각을 안 하고 있어.”
분명 그의 입에서 나오는 낯선 여자의 이름은 얼마 전 만났던 그녀의 이름이라는 것을 나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고 내가 뜻대로 헤어져 주지 않는다고 그녀에게 투정이라도 하는 것인지 잔뜩 인상을 쓴 채로 그는 전화를 하고 있었다. 손잡이에 쥐고 있던 손에 힘이 자연스레 들어갔다.
“약? … 아직 좀 남았어. 한 3일 분 정도? … 응. 내일 낮에 갈게. 응. 아, 안 된다니까! 지용이 알면 진짜 안 돼! 걔 성격으론 분명 내가 죽을 때까지 내 병수발 다 할 거라고 내 곁에 남아 있을 거라고 난리 칠 게 분명한데, 누군들 같이 안 있고 싶어? 나도 지용이 사랑해! 평생 내 곁에 두고 싶어! 그런데… 그런데 나 아프잖아……. 길어 봤자 1년이라며. 점점 죽어가는 내 모습을 보는 걔를 상상하면 내가 미칠 거 같아! 나도 나 때문에 걔가 힘들어 하는 거 보기 싫어! 그래, 네 말대로 내 곁에 있는 다고 쳐! 그리고 나 죽고 나면? 나 죽고 나면 여기 남아있을 걔는 어떡해! 그럴 바에 나랑 헤어지고 다른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게… 나란 놈 잊고 그렇게 사는 게… 그게 나아.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어차피 나랑은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없어. 그냥 내 맘도 걔 맘도 편하게…… 이렇게 계속… 헤어지자는 소리 나올 때까지… 계속 연기할 수밖에 없어, 혜인아.”
믿을 수 없는 말들이 그의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 짜고 쇼를 하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내 눈 앞에 지난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평소에 먹는 것에 반도 제대로 못 먹던 모습과 소화제라며 챙겨 먹던 약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가는 그의 모습. 나는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그대로 집 밖을 뛰쳐나와 버렸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대가는 참혹한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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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의 일이 잘 기억나질 않는다. 기억이 들쑥날쑥 했다. 어떤 날은 미친 듯이 술을 퍼마셨고 어떤 날은 아예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어떤 날은 방안에 혼자 엉엉 운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주 또렷하게 기억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갑작스럽게 이해되지 않을 내 행동을 보면서 그는 아무 말 없이 음울하게 푹 꺼져버린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었다. 도대체 내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 것인지 어떤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 것인지 모든 것을 알아버린 이 상태에서 무엇 하나 고르기란 엄청나게 어려운 것이었다. 모든 진실을 알아 버린 내가 그의 요구에 따라 헤어져 준다면 아픈 그를 두고 돌아서버린 매정한 인간이 되었다는 죄책감에 힘들 것이 분명했고 끝까지 이 관계를 붙들고 있자하면 그가 미친 듯이 괴로울 게 분명했다. 힘겨운 갈등 속에서 헤매던 내게 한 통의 전화가 왔었다. 오혜인, 그 여자였다.
[도저히 숨기기 힘들어서 전화했어요. 사실 만나 뵙고 말씀드려야하는 건데, 지용 씨가 절 피하실까봐 이렇게 전화로 말씀드려요. 일단, 속여서 미안해요, 지용 씨. 사실 저 승현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승현이, 제 오래된 친구에요. 그리고 주치의구요. 승현이가… 많이 아파요. …… 위암 말기에요. 이미 다른 장기 몇 군데로 전이된 상태에요. 그래서……. 승현이가, 승현이가 지용 씨 엄청 사랑해요. 그래서 자기가 이렇게 아파하는 모습, 죽어가는 모습… 지용 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대요. 그래서 저랑 승현이랑 짜고 지용 씨 속인 거구요. 미안해요. 지용 씨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게 맞는 건데, 저 승현이 친구잖아요. 승현이가 너무 간절하게 부탁해서… 자기 마지막 소원이라고… 지용 씨랑 헤어지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너무나 간절하게 부탁해서 승현이 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지용 씨.]
그 뒤로도 그녀의 고백은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소원. 죽음을 앞둔 그의 인생의 마지막 소원은 보통의 죽음을 앞든 사람들의 소원으로 자주 꼽히는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니었고 돈을 미친 듯이 써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나와의 이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전에 머리 터질 것 같은 두통을 참아오며 갈등했던 것을 깡그리 다 밀어 내 버리고 마음을 먹었다. 그의 간절한 그 마지막 소원을 들어 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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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보내고 한참이나 거실에 주저앉아 있다 어둑한 밤이 찾아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환히 열려 있는 옷장은 그가 급하게 짐을 싼 티를 역력히 나타내주고 있었다. 옷장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그의 옷이 나간 빈자리가 참으로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한 사람의 자리가 썰물처럼 쑥 빠져나간 흔적이 이곳저곳 눈앞에 펼쳐져 있는 데도 나는 아직도 우리의 이별이 실감 나지 않았다.
옷장의 문을 닫으려고 그 앞에 서니 발바닥에 무언가 밟혀 발을 살며시 들었다. 그 자리에는 몇 년 전 그의 생일에 함께 맞췄던 우리의 약속이었다. 아무리 급하게 준비해서 나가도 그렇지… 이걸 어떻게 흘릴 수가 있냐. 어찌 보면 화가 날만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피시하고 웃음이 나왔다.
허리를 숙여 반지를 들어 침대 옆의 협탁 서랍을 열어 깊숙이 넣어두고 서랍을 닫았다. 한숨을 내 쉬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협탁 위에 놓인, 밝게 웃고 있는 우리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졌다. 한 손을 들어 조심히 감은 두 눈을 꾹 눌렀다. 그런데도 감은 눈 사이를 비집고 지금껏 참아왔던 모든 것들이 터져 나왔다.
“흐,… 흐흑…….”
아랫입술을 윗니로 꾹 누른 채로 감정을 억누름에도 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폭발해버린 불꽃은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얼마가지 못해 입 밖으로 펑하고 터져버렸다. 작은 액자를 가슴에 품고 목이 쉬도록 머리가 웅웅 울릴 정도로 소리 내어 울어버렸다. 이미 오래 전 떠나버린 그에게 내 울음소리가 닿기를 바란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나 이렇게 울고 있어. 이렇게 당신을 향해 울고 있어. 내 손으로 보내주어 놓고 또 이렇게 당신을 찾아 헤매는 이렇게 한심한 나를 봐. 최승현. 승현이 형.
“사랑해. 흑…… 정말… 흡… 정말 사랑해.”
이 집을 가득 메운 나의 애처로운 고백의 당사자 끝끝내 그 것을 듣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