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이 울음을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흐릿한 날씨였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축축한 냉기와 옅은 물비린내에 기분이 좋아 발걸음을 늦추었다. 젖은 우산에 다리가 닿는 것마저 날 기분 나쁘게 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비가 올 때마다 바지가 젖는다며 투덜대던 그가 떠올랐기에 나는 일부러 우산을 제대로 잡지 않았다.
열쇠로 문을 따고 가게에 들어섰다. 퀴퀴한 공기가 외로이 부유하고 있었다. 우산을 탈탈 털고 우산꽂이에 꽂았다. 평소라면 ‘OPEN’으로 판자를 뒤집어야 했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문은 열린 채로 내버려두고 블라인드를 올렸다. 불을 켜고, 탕비실에서 행주를 꺼내 창가의 테이블 하나를 잘 닦고, 시럽들을 정돈하고, 구석구석 먼지를 털었다.
그새 직장인들이 허둥지둥 지나간다. 커피포트에 물을 넣고 전원을 켠 후, 구석에 처박혀 있던 핸드밀에 원두를 넣어 테이블에 앉았다. 차가 띄엄띄엄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며 핸드밀을 돌리기 시작했다. 까드득 까드득 소리가 난다. 흰색인지 회색인지 모를 구름들은 애매하게 걸린 채로 서성인다. 날이 서쪽에서부터 개어 온다는데 그럼 그가 있는 곳은 화창할 터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늘을 생각하면 불안하고 떨렸는데 말이다. 지금은……. 오늘 같은 날에도 늦잠을 잘 그가 떠올라서 웃음이 나고, 오늘 같은 날에도 늦잠을 잘 그를 생각하는 내가 주책이어서 또 웃음이 난다.
- 모든 것들이 그대로다.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변하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이며 그래서 그것들은 그대로다. 하지만 내 옆에 그가 없어서는 안 되므로 그는 그대로이지 않다. 그가 없는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오늘은……, 그는 늦잠을 잤으니 늦을 것이고, 나는 그를 기다릴 것이고, 다시 많은 것들만이 변할 것이며 우리는 다시 그대로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하늘은 자유롭고, 난 이만하면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해…….
=
겨울 밤, 발개진 귀를 슥슥 비비면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아직 어린 겨울이 전날 뿌린 비는 살얼음이 되었고, 파삭파삭 밟힌 결정들이 조명을 받아 찬란한 빛을 냈다.
“저기요!”
부드럽지만 꺼끌한 목소리가 목덜미를 핥았다. 하마터면 멈춰 설 뻔했다. 아주 잠깐, 그 목소리가 나를 부른 것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잠깐만 그런 생각이 든 이유는, 그 생각을 시작하고 아주 잠깐 후에 누군가가 내 등을 톡톡 쳤기 때문이었다.
“저기요……!”
울먹울먹.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묘하게 무딘 날이 선 소년.
“……차 있으세요?”
그는 새까맣고 작은 몸뚱이를 품에 안고서 나를 올려다봤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털뭉치를 고쳐 안으며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동물병원까지 좀, 데려다 주세요.”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쓰레기통 옆에서 발견한 새끼 푸들이라고 했다. 난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고 자그마한 게 힘없이 학학거리는 통에 그는 제대로 뛰지도 못하고 경보하듯 걸어서 날 따라왔다. 조수석에 앉아서는 동물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내비게이션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발을 동동 굴러대었는데, 그러면서도 강아지는 털끝도 흔들리지 않게 했다. 강아지는 두어 번 칵칵 토악질을 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괜찮아' 하고 나지막이 말하면서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파보예요.”
“…….”
“이미 많이 늦었어요. 아직 어리고…….”
나와 그는 진찰대 옆에 서서, 숨이 멎어가는 작은 몸뚱이를 끝까지 지켜봤다. 결국 그 강아지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눈을 감은 채로 작게 할딱대다가, 힘겹게 눈을 떠서 우리를 보고는 숨이 멎었다. 그는 툭 치면 터져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눈물 몇 방울을 매달고서 강아지의 눈을 감겨주었다.
“……묻어 줄래요?”
나도 모르게 한 말이었다. 그는 작게 응, 했다.
그는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정말 우습게도, 우리는 그 강아지를 묻으며 이름을 지어주었다. 시월이. 그래, 시월의 끝자락이었다. 아직 설익은 겨울, 그렇게 우리가 만났다.
=
덜그럭. 핸드밀의 손잡이가 맥없이 돌아갔다. 찬장에서 드리퍼와 머그잔, 필터를 꺼내어 필터를 드리퍼에 잘 맞춰 끼우고 머그잔에 얹었다. 핸드밀 뚜껑을 열고 커피 가루를 필터 위에 탈탈 털었다. 커피포트의 물을 드립 포트에 따른 후 드립 포트를 기울여 커피 가루에 조심스레 부었다. 고소하고 시큼한 향기가 가득 퍼졌다. 이럴 때 나는 슬쩍 억울해진다.
=
두 번째로 만난 그는 살짝 부은 눈에 알이 없는 까만 뿔테 안경과 꼭 맞는 청바지, 후드집업 차림이었다. 그는 손님이었고 나는 카페 점장이었다.
“어서 오세…….”
“안녕하세요.”
내가 카운터 앞에 서서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자, 아르바이트생들과 직원들은 이상한 사람 보듯 내게 눈치를 주었다. 그 광경을 보던 그가 메뉴판을 재빠르게 훑어보고 아르바이트생 하나에게 말하며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키위 스무디 한 잔이요.”
그리고 나를 장난스레 흘겨보고는 체크카드를 받아서 창가의 테이블에 가 앉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는 조금 지쳐 보였다.
“어제 감사했어요.”
“어떻게 왔어요?”
“차에 명함 뭉치가 꽂혀 있었거든요.”
내비게이션만 보고 있던 건 아니었나 보다.
“……그렇구나.”
대답 대신 작게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몰랐는데, 속눈썹이 길었다. 우린 꽤 오래 말이 없었다.
“……그냥 와봤어요.”
그냥요? 하고 물으려는데 아르바이트생이 키위 스무디를 들고 왔다. 덕분에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원래 마시려 한 건 아니었던 듯, 그는 빨대에 입을 대지는 않고 플라스틱 컵에 둘러 끼워진 골판지를 만지작거렸다.
“가게 예뻐요.”
“고마워요.”
“앞으로 자주 올지도 몰라요.”
“네?”
“이 앞 학교 다녀요, 저.”
국어국문학과 1학년이라고 했다. 08학번. 솔직히 조금 놀랐다. 국어국문학과라는 것도 의외였는데, 대학생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피부는 중학생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매끈해 보였다. 목소리는 변성기가 오다 만 것 같았고 무엇보다 아직 시들지 않은 얼굴빛이 그를 더욱 어려 보이게 하는 듯했다.
뭐,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나 내게는 똑같이 한참 어린 동생이긴 했지만.
“전 00학번인데.”
“……와, 능력 좋네요.”
“아저씨라고 안 해줘서 고맙네요.”
“스물여덟 살이 무슨 아저씨예요. 스물여덟 살이 카페 점장인 게 대단하지.”
그는 스무디를 두어 모금 삼키고 일어났다.
“가볼게요.”
“벌써요?”
“약속 있는데 들른 거예요.”
나는 덩달아 일어서며 멋쩍게 웃었다.
“……저기.”
“네?”
그는 뒤돌아 나가려다 쿡쿡 웃고는, 웃음을 참으며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제 이름, 끝까지 안 물어보시네요.”
“……뭔데요?”
“안 가르쳐 줄래요.”
카운터 위의 명함을 한 장 뽑아 개구지게 흔들어 보인 그는 빨대를 빨면서 가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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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벌써 땅바닥에 빛들을 메다꽂았다. 아침에 온 비도 많이 온 게 아니었던 터라 다 마르거나 조금 얼어 있었다. 커피는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이 조금 뜸해졌다. 미지근해진 커피를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이렇게라도 해야 조금 기다림이 덜할 것 같았다.
벽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책장에서 얇고 작은 책 한 권을 꺼냈다. <살아 있는 동안 지켜야 할 가장 아름다운 약속>. 다섯 번째로 만났을 때 그가 선물한 소설책이었다. 내 생일 다음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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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말해줬으면 좋았잖아요.”
“나도 잊고 있었다니까요.”
“그게 말이 되냐고요.”
“말이 되죠, 왜 안돼요.”
“아, 진짜 말을 말아요.”
사실은 부담스러워할까 봐 말을 않던 것이었는데, 내가 점장으로 승진했을 때부터 일한 소정이가 어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우리 테이블에 와서 케이크를 가져다 놓는 바람에 들통 나 버렸었다. 노래를 부르는 소정이를 쳐다보던 그는 헛, 하고 짧게 웃었다. 지금의 잔소리는 어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내가 난처해하자, 틱틱대던 그는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탁 올려놓았다.
“영수증 없으니까 돌려주지 마요.”
“선물?”
“응.”
그는 존대를 하면서도 ‘네’ 대신 ‘응’이라고 대답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대신 오늘 스무디 값은 안 낼 거예요.”
그 말에 난 그와 꽤 친해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10초쯤 뒤에 난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다섯 번째 만남 이후로, 그가 카페에 오면 공짜로 스무디 한 잔을 만들어 주고 근처 놀이터에서 그와 30분 정도 얘기하는 게 한동안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겨울이 되자 우리는 거의 매일 밤 열심히 나다녔다. 그는 문 닫을 시간이 되면 와서 나와 직원들이 정리를 하는 동안 창가의 테이블 하나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 겨울부터 그는 집안 사정 때문에 우울해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럴 때면 내 어깨에 이마를 대고 울었다. 난 그가 시월이에게 했던 것처럼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와 내가 그대로였던 5년 동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애정을 담아도 그가 처음 보는 작은 생명에게 해주었던 것만큼 따스하고 부드럽게 해낼 순 없었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셔츠 대신 면티를 입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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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서 이 책을 받았을 때, 조악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제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책등 옆에는 <The Wish List>라고 씌어 있었는데 원제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간결하고 멋진 제목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앞표지에까지 쓸데없이 적혀 있는 한줄 서평들은 안 그래도 작은 책에 더 여유가 없어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수십 번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책이었다.
사라락.
손가락으로 책장을 쭈룩 넘겨보았다. 종이는 조금 빛이 바랬다. 갑자기 열댓 장이 한 번에 넘어가더니 책장이 자연스럽게 한 곳에서 펼쳐졌다. 푸른색 형광펜이 한 줄 그어져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내가 그은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가. 똑딱똑딱 똑딱똑딱. 자꾸 지나가.”」
……뭐야, 너무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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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종일 연락이 없었다. 크리스마스 날 따로 만날 정도의 사이가 아니긴 했지만 사람 마음이란 것이 참 간사했다. 나에 대한 그의 무관심이 조금은 상처가 되었는데, 이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분이었다. 나는 집 앞 주차장에 땅거미가 앉기까지 그의 휴대폰에 두 통의 문자와 한 통의 부재중 통화를 남겼다.
캐럴송이 흘러나오는 라디오, 길거리, 그리고 반짝거리는 것들이 처음으로 짜증스러웠다. 전부 그 때문이었다. 내가 그를 생각하는 만큼 그가 나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애처럼 화가 나는 것이었다.
“너, 차이기라도 했니?”
우중충한 낯빛으로 에스프레소를 끓이는 내게 어머니가 눈치를 주며 한마디 하셨다. 나는 오랜만에 뵌 부모님 앞에서 괜한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결국 에스프레소는 끓어 넘쳤다.
“아들, 전화 왔다.”
가스레인지에 흥건한 커피를 닦고 있는데 아버지가 웅웅 울리는 휴대폰을 내 주머니에 꽂아 넣으셨다. 어차피 그는 아닐 것이다. 갈색이 된 행주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문학 소년이 누구냐?”
나는 곧바로 행주를 개수대에 던졌다. 그였다. 나 당신 기다리다가 쓴맛 볼 뻔했어.
“단골손님이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플립을 열자마자 진동이 멈췄다. 화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물음표, 물음표. 그 물음표가 내 것이 되려는 순간, 물음표가 사라지고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이번엔 아주 바르르, 말이다.
“여보세요.”
[연락했었어요? 미안해요.]
진짜로 그였다.
“아, 아니에요. 바빴어요?”
[음……. 일이 좀, 있었어요.]
“……아. 그래요.”
내 어정쩡한 대답에 그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그래요오.]
“아, 왜 그래요.”
[아아, 왜 그래요오.]
“…….”
그가 깔깔댔다.
“애예요?”
[점장님에 비하면 한참 애긴 하죠.]
“…….”
나는 방금이라도 관에서 나온 사람이 된 것 같았다. 8년이 뭐라고, 난 이 사람의 생기에 이렇게 압도당하는 것일까?
[……큼, 점장님.]
“네?”
[……메리 크리스마스.]
=
「“어떤가?” 빌제버브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재촉하지 마세요!” 몸집이 작은 동양인이 바로 앞에 놓인 회색 젤리 모양의 물체에서 눈도 떼지 못한 채 투덜거렸다.」
찬바람이 기웃거렸다. 3시……. 아직은, 빛이 이기는 중이었다. 책을 엎어두고 일어나 문을 밀어 닫았다.
-쨍그랑.
이대로 쫓겨나긴 싫었던 건지, 바람은 문 옆 선반에 있던 작은 화분 하나를 내던지고 사라졌다. 작은 꽃 모양의 열매들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기린초가 흙더미와 화분 파편들 틈에 널브러졌다. 바닥과 바짓단에 온통 흙이 묻었다. 나뭇가지처럼 갈색으로 여문 줄기를 주워 흙을 털고 선반에 얹어두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그가 오기까지 할 일이 하나 더 생겼으니까.
=
그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기린초네요?”
“아, 맞아요. 꽃도 안 폈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엄마가 키우셨어요. 별로 좋아하는 꽃은 아니에요.”
“왜요?”
“글 쓰다가 알게 됐는데, 꽃말이 ‘기다림’이거든요.”
“기다림이 싫어요?”
“……슬퍼 보이니까?”
나는 끄덕끄덕 하면서 냉장고에서 딸기를 꺼냈다. 그는 항상 앉는 창가 자리에 턱을 괴고 앉아 내가 스무디 만드는 것을 구경했다. 아주 늘어지는 얼굴로. 개강 시즌인데 요 며칠 계속 태평한 모습이었다. 벌써 3월 10일이었다. 가방을 들고 온 적도 없었다.
“학교 안 가요?”
“멀었어요.”
“벌써 10일인데?”
“…….”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군대 가요?”
“……20일에 입대해요.”
자꾸 잊게 되는 사실이었지만, 그도 어엿한 성인이었다.
“어쩐지, 한가해 보이더라.”
“뭐예요!”
나는 분홍색의 스무디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표정만큼 내 마음이 복잡해졌다.
“2주도 안 남았네.”
“그러게요.”
“이런 뽀얀 애가 군인이라니, 말도 안 돼요. 우리나라 진짜 이상한 것 같아.”
“뽀얀 애라뇨! 저도 나름 어른인데요. 면회나 오세요.”
“면회는 자주 갈 테니까, 잘 철들어서 와요.”
“철들었거든요.”
“너무 발랄하고 어려서 문제거든요?”
“못됐어…….”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조금 울먹였다.
“이것 봐. 또 울잖아요.”
“안 울어요…….”
“거짓말도 하고.”
“…….”
웃게 해 주려던 거였는데, 이내 그의 하얀 얼굴에 애처로운 줄이 죽죽 그어졌다. 빛이 우리를 보고 있지 않은 때라면 어깨를 빌려줄 수 있었겠지만 한낮의 카페에서는 곤란했다. 그리고, 고민을 끝마칠 겨를도 없이 제멋대로 튀어나간 손은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움찔한 그가 내 팔목을 잡았다. 그뿐이었다.
“울지 말고…….”
“…….”
“나도 갔다 왔잖아요? 이렇게 눈물이 많아서 어떡하려고 그래.”
“나 원래 많이 안 울어요…….”
“또 거짓말.”
처음 닿은 그의 볼은 부드러웠고, 그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
흙내음이 그득히 차올랐다.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고 목장갑을 벗었다. 손에 나프탈렌 냄새가 배었다. 화분 파편과 흙이 담긴 마대자루에 장갑을 넣고 탕비실 문 앞에 내려놓았다.
축 처진 모양새가 마치 나 같아서 괜히 한숨이 나왔다.
의자에 다시 앉는데 테이블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책이 팔에 밀려 툭 떨어졌다. 노란 편지봉투와 사진 한 장이 튀어나왔다.
삐뚤빼뚤하지만 단정한 그의 글씨로 씌어진 수많은 편지들 중에서 그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편지였다.
=
입대하기 전날 아침, 삭발한 머리를 빨간색 비니로 가리고 나타난 그는 씩 웃고서 집주소를 물었다. 손님이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선반의 먼지를 털다 말고 그에게 집주소를 불러주었다. 작은 수첩 첫 페이지에 뭉툭한 손끝이 하얘지도록 내 집주소를 꾹꾹 눌러 적은 그가, 잠시 망설이더니 비니를 벗었다.
“좀……. 웃기죠?”
“……귀여운데요.”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엑,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애 취급 좀 하지 마요.”
“애 취급이 아니라, 진짜 귀여워서 그래요. 그리고 언제는 나에 비해선 한참 애라면서요.”
“아무리 그래도 애는 아니에요. 군대 가는 애가 어디 있어요?”
“국어 한다는 사람이 왜 말을 막 바꿔요?”
“무슨 상관이에요!”
정말 깜찍한 분노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 아쉽게도 - 계속 화를 내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는 여린 사람이라서, 한 감정에 오랫동안 고무되면 지쳐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겨우 달래서 사진 찍기를 제안했다. 그와 나는 뻣뻣한 대한민국 남자 티를 내며, 누가 봐도 어색한 사진 세 장을 찍고 헤어졌다.
그 다음날 내가 그의 입소식에 가지 않은 것은 그와 나의 암묵적인, 일종의 약속이었다. 그는 와 달라는 말 대신, 형이라고 불러도 되냐는 질문을 했었다. 무언의 부탁을 한 셈이었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며칠 뒤 하얀 편지 봉투가 내 앞으로 배달되었다.
‘제 22교육연대 1교육대 3중대 4소대 23번 훈련병 권지용’.
그렇게 낯선 글자들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와 함께 놀이터에 가지 않은 지 꼭 닷 달이 되는 날, 기린초에 노란 꽃이 피었다. 그를 닮은 듯한 자그마한 꽃들이었다. 그리고 그 기린초를 닮은 샛노란 편지 봉투 하나가 카페의 철제 우편함에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에게서 받은 여섯 번째 편지였다.
‘편지지가 정말 예뻐서, 커피향이 가득한 카페에서 이 편지를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집으로 보내면 형은 틀림없이 그 자리에서 뜯어버릴 테니까, 카페로 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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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그가 편지에 넣어 보냈던 것이었다. 조금 탄 피부에 땀범벅이 되어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담긴 이 사진은 한동안 내 방 액자에 끼워져 있었다. 그 액자는 지금 내 모습까지 함께 담고 있지만, 어쨌든 꽤 오래 내 방 한켠을 차지하고 있던 이 사진은 지난 일 년간 이 책 속에서 묵은 잠을 잔 것이 분명했다.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펼쳤던 편지지를 접어 사진과 함께 봉투에 넣었다. 하지만 책에 끼우지는 않았다. 혹시 오늘 그가 계속 늦잠을 잔다면……. 봉투 째로 액자에 넣어 놓으리라 다짐했다. - 그가 정말 늦잠을 잔다면, 말이다.
켜켜이 쌓여 온 작은 불안과 외로움들이 어둠을 보고 흥분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래서 다시 봉투를 열었다.
그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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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뭡니까, 아니, 뭐예요?”
낑낑대며 상자를 들고 나타난 내 모습에 놀란 그가 얼른 상자를 열어 쿠키 통 여러 개를 집어 들었다. 상자 안쪽에서 피자 냄새가 확 풍겼다. 그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노파심에 하는 얘긴데,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마요. 그리고, 피자는 내무반 분대원들이랑 먹으라고 샀어요.”
“……요즘은 생활관이라고 그러는데…….”
“아……. 진짜요?”
“아저씨 아닌 줄 알았더니, 아저씨였잖아.”
“와, 생각해서 챙겨 왔는데 하는 소리가 그거예요?”
“……아니, 그러니까……. 고맙다구요.”
쑥스러워 하는 모습이 어린애 같아서 미소를 지어보였다. 면회실 의자에 상자를 탕 놓고 그가 입은 잘 다린 군복을 보는데 참 기분이 묘했다.
“각 잡힌 거 봐. 아까 ‘뭡니까’라고 해서 얼마나 놀랐게요?”
“…….”
그가 조금 얼굴을 붉혔다.
바지가 칼날이란 말까지 하면 화를 낼 게 뻔했다.
“쿠키 좀 먹어요.”
“진짜 감사하지 말입니……. 아.”
“……다ㆍ나ㆍ까 좀 안 쓰면 안 돼요?”
“이게……. 버릇이 돼서…….”
“알았어요. 뭐 어쨌든, 잘 지냈어요?”
“보고 싶었어요.”
조금의 쉼표도 없이 그렇게 말한 그는 크랜베리 쿠키를 입에 넣고 활짝 웃었다.
“정말로 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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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시계를 보았다.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창밖에선 드문드문 노랗고 빨간 불빛들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시월의 밤은 흐릿했다. 왼쪽이 손톱만큼 깎인 달이 창백하게 빛을 냈다.
직장인들이 머리 위로 가방을 들고 헐레벌떡 뛰어 지나갔다. 비가 오는 모양이었다. 그의 눈물이 떠올랐다. 비 오듯 후두둑 떨어지던 눈물, 그와 내가 새로운 시작을 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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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호흡을 했다. 그가 나오길 기다리는 몇 분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딱딱한 군화가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가까워 오더니 그가 헐떡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 올 줄은 몰랐지 말…….”
“다ㆍ나ㆍ까 아직도 못 고쳤어.”
“저도 살아야죠!”
“됐고, 이거나 받아요.”
나는 내 옆의 의자에 얹혀 있던 쇼핑백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 그는 쇼핑백을 받아들고 나와 마주 앉았다.
“선물?”
“나름 고심해서 고른 거예요.”
그는 쇼핑백 입을 살짝 벌려 보고는 작게 탄성을 뱉었다.
“비싸서 못 샀던 건데…….”
“학생한테나 비싸죠.”
“그래도, 거의 대여섯 권 다 될 것 같은데……. 이게 한 권에…….”
그가 재차 쇼핑백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요. 글 열심히 써요.”
“…….”
“생일 축하해요. 그리고…….”
기쁨과 호기심이 뒤엉킨 두 눈이 반짝거렸다.
“……만년필도 있는데. 이거 받으려면, 대답 하나 해 줘요.”
“……무슨……?”
몇 주 동안 기껏 다스린 심장이 다시금 급하게 벌컥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면회실의 하얀 벽들과 주변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말소리들에 조금 움츠러들 뻔했다. 나는 큼큼, 괜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좋아해요.”
숙이고 있던 그의 고개가 퍼뜩 섰다.
“나, 좋아해 줄래요?”
“아…….”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볼을 씻어 내렸다. 여기저기서 우리 테이블을 힐끗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한참 울던 그는 애써 눈물을 닦아내며 훌쩍였다.
“오늘은 어깨 못 빌려줘요.”
“흐으……. 왜요…….”
“얼굴 볼 거니까.”
“……못됐어…….”
“대답, 안 해줄 거예요?”
“……난,”
그가 퉁퉁 부은 입술을 달싹였다.
“……난, 이미 그러고 있었어…….”
그리고 그는 못난이가 된 얼굴로 그의 이름이 새겨진 만년필을 꼭 쥐고 또 눈물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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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차갑게 식었다. 커피잔 입구는 깨끗한 채였다. 커피잔이 빌 때까지 그가 왔으면 했다. 이렇게 될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애써 그의 생각을 밀어 두고 다른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다시 그를 생각하게 될 것이었다. 다른 생각을 포기하고, 그의 생각을 하기로 작정하는 것이 나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대로였던 날들을 그리워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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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 탁. 조수석 문이 열리고 닫혔다.
“오랜만이에요.”
“그저께 봐서 별로 안 그런 것 같은데요.”
“피자랑 치킨은 잘 먹었어요?”
“응, 제대 이틀 전에 음식 들고 면회 오는 사람 처음 봤다고, 후임들이 아주 그냥…….”
“역시 내가 짱이죠?”
한참을 신이 나서 종알거리던 그는 내가 시동을 걸자 뒷좌석에 짐을 던져놓고 안전벨트를 맸다.
“빨리 가요. 스무디 먹고 싶어.”
“……오늘 카페 닫았어요.”
“에?”
“우리 집 가요.”
“형 집을, 가자고요?”
그의 놀란 표정을 보는 것을 즐기게 된 데에는 사실 내 탓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저렇게나 사랑스러운데 안 그러고 배길까.
“부모님한테 전화 할래요?”
“……아뇨. 그냥 빨리 가요.”
“어딜요?”
“……형 집.”
왠지, 그의 얼굴이 발개진 것도 같았다.
고속도로에서 잠든 그는 톨게이트를 지나, 시내를 지나 주택가에 도착하기까지 깨어나지 않았다. 긴장이 풀려서 그랬는지, 색색 소리까지 내가며 잠든 그를 깨우기가 미안했지만 얼른 옷을 갈아입고 쉬는 것이 나을 듯해서 그의 몸을 살짝 흔들었다.
“일어나요. 다 왔어.”
“으응…….”
손으로 눈가를 비비고 쭉 기지개를 켠 그가 눈을 깜빡거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갈 때쯤 그는 완전히 잠에서 깬 모습이었다.
“집 좋다.”
“그냥 아파튼데요, 뭘. 옷 갈아입어요. 옷 사왔어.”
“이따가……. 우리 뭐라도 좀 먹으면 안 돼요?”
“나가서 먹으려고 했는데.”
“나 자장면 먹고 싶어요. 자장면 시켜요. 나가기도 귀찮고…….”
내게 부담이 될까 봐 그러는 것이 분명한데 괜히 귀찮은 척을 하는 것이 고마워서 모르는 척 속아 주기로 했다. 휴대폰에 중국집 번호를 입력하면서 DVD 플레이어를 켜는데 그가 자연스럽게 소파에 가 앉더니 자기 옆자리를 팡팡 쳤다.
“누가 보면 자기 집인 줄 알겠네.”
“내 집 맞죠. 뭐 볼 거예요?”
“아무거나 골라요. 여기 DVD 많아.”
내가 중국집에 주문을 하는 동안 고민하던 그가 고른 영화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었다. 그는 DVD를 건네며 말했다.
“한겨울에 애인 집에서 보기에 손색없는 영화죠.”
할머니로 변해 버린 소피가 몰래 집을 나오려 할 때 즈음 초인종이 울렸다. 제대로 산통을 깨는 타이밍이었다. 문을 열어 자장면을 받고 주머니를 뒤져 꾸깃꾸깃한 지폐를 꺼냈다. 플레이어를 멈춘 그는 맥이 빠져서 부루퉁하게 화면만 응시했다. 문을 닫은 후 그의 옆에 다시 앉으며 물었다.
“……안 먹을 거죠?”
그는 대답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옅게 웃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땅거미가 졌다.
“……저 머리카락도 충분히 아름다운데.”
그가 작게 말했다. 염색이 엉망이 되어 반쯤 미쳐 버린 하울이 검은색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아름답지 않으면 살아갈 의미가 없어”라고 한탄하는 장면이었다.
“……검은색은 나빠 보이니까 그런 것 아닐까요?”
내 물음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형도, 검은 머리인데,”
“…….”
“나도 나빠 보여요?”
나는 그럴 리가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왠지 모르게 영화의 볼륨이 작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형은, 좋은 사람이잖아요.”
“내가요?”
“그래요. 그래서, 나도 형한테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아,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있었던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넘겼고, 그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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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우리가 그대로이게 된 지 1년이 조금 넘은 날이었고, 우리가 새로운 시작을 한 지 다섯 달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내가 선물했던 노트를 채워나갔다. 우리는 흔한 연인들처럼 4년을 보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작은 잡지에 소설을 연재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그를 데리러 혹은 그와 시간을 보내러 내가 그의 집에 가지는 못했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4년 동안 네 권의 노트를 채운 그는 다섯 번째 노트를 여는 것을 계속 미루었다. 그리고 노트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그 시간 동안 내 어깨를 단 한 번도 빌리지 않았다. 나는 그가 어른이 되어 간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어른이었고, 어른이 되어 가고 있던 사람은 그가 아닌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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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서늘한 저녁 공기가 조금 무거워진 그런 날씨였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에게는 한 시간 가까이 걸릴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단골 국밥집까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뛰다시피 걸어서 문을 열었지만 어느 자리에도 그는 없었다. 급하게 실내를 훑던 나를 알아본 주인 할머니께서 그가 나갔다고 알려 주셨다. 밖으로 나와 건물 화장실로 향했다. 하지만 화장실에서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못 놀래 주는 것은 좀 아쉽지만 전화를 해야 할 듯싶어서 건물의 복도를 걸으며 휴대폰을 꺼내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너 걸음만 가면 보일 코너 쪽이었다.
“……무슨 상관인지 잘 모르겠어요.”
숨을 죽이고 우뚝 섰다. 분명히 그인데, 그답지가 않았다.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병이 아니란 말예요.”
희미하게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몇 개월 만에 듣는 그의 울먹이는 음성이었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요.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듯이요. 나는…….”
나는 발길을 돌렸다. 국밥집의 딱딱하고 낡은 의자에 앉아서 그를 기다렸지만, 그는 끝내 오지 않았다. 대신 급한 일이 생겨서 못 만나겠다는 문자 한 통만이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 날에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웃으며 카페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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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입은, 아무런 그림도 글씨도 없는 부드러운 검은색 후드 티셔츠 안으로, 카페에 들어오지도 못하는 찬바람이 스몄다. 한기가 돌았다. 그럼에도 외투를 입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기 위함이었다.
밤이 길어질수록, 버텨내기 힘들어졌기에…….
지난 1년은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아프지 않았다. 그가 네 번째 노트의 첫 장을 채우며 한 말이 있었다. 점을 찍고 바로 옆에 문장을 이어나가는 것과, 점을 찍은 후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는 것은 굉장히 다르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자신은 둘 사이에서 고민이 될 때마다 보통은 줄바꿈 대신 띄어쓰기를 택한다고 덧붙였다. 그에게서 이별 아닌 이별을 통보받았을 때 나는 그가 이번에도 그러리라 믿었다.
작년의 이 날 이 곳 이 시간에, 그는 그 마지막 노트를 테이블 위에 둔 채 나와 마주앉아 있었다. 그가 어른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날의 밤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시월이를 묻은 지 5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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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울먹이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조금 아파 보였다.
“형.”
처음으로 그의 말에 대답하기가 싫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나를 불렀다.
“형…….”
“왜 그렇게 부르는데요?”
“……미안해요.”
그는 잠시 호흡을 고르고서 노트를 내 쪽으로 밀었다. 견디기 힘든 침묵이 그와 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
“형은 좋은 사람이니까, 기다려 줄 수 있을 거예요.”
그의 어투는 단호했다. 나는 내가 그를 말릴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1년만, 생각하고 올게요.”
“…….”
“딱 1년만.”
나는 손을 뻗어 노트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장의 가장 아래쪽 끄트머리에 노트를 꽂는 나를, 그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그의 옆에 가 섰다.
“……그 날은, 늦잠 자면 안 돼요.”
울음을 꾹 참으며 바들거리는 그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한 번, 나를 올려다보고 잡히지 않은 손으로 내 손을 떼어 냈다. 돌아서서 카페를 나선 그의 뒷모습은 어둠 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벌써부터 그가 그리워지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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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드문드문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하루가 위태롭게 발을 떼려 하고 있었다. 그 하루를 붙잡지는 않겠지만, 버려질 오늘을 잊지도 않을 것이었다.
책을 덮어 원래 위치에 꽂으려다 몸을 숙여 쭈그려 앉았다. 단정히 기대어 있는 그의 노트 옆에 책을 꽂았다. 검은 노트와 하얀 책등은 잠시 머뭇거리다 일어나는 나를 담담하게 무시해 주었다.
-눈물이 났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어느새 땅을 세차게 때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의 커피잔은 차마 치울 수가 없어 우선 블라인드를 내렸다. 먹구름을 숨길 만큼 어두운 바깥조차 이제 보이지 않게 되었다.
행주를 빨아 널고 타월로 개수대의 물기를 닦았다. 해야 할 일이 조금이라도 더 있다면 좋았겠지만, 남은 것은 커피잔 뿐이었다.
한참을 커피잔 앞에서 망설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커피를 내리지 않았을 텐데. 짧은 후회가 스쳤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아직까지 늦잠을 자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줄바꿈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두 가지 모두 그가 하는 일이었다. 내가 할 일은 기다리는 일이었고 나는 내 일을 마쳤다.
바들거리는 손끝이 잔에 닿았다. 차갑고 미끈했다. 눈을 꾹 감는데 간신히 매달려 있던 눈물이 턱을 타고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잔에 손을 댄 채 다른 손으로 한참 동안 눈물을 훔쳐냈다.
나는, 당신 없이 그대로일 수가 없어…….
용기를 내어 잔의 손잡이에 네 손가락을 꿰어 넣었다. 개수대의 구멍에 커피를 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잔의 옆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커피가 눈물처럼 보이는 것, 그뿐이었다. 커피잔에 세제를 과하다 싶을 정도로 짜넣고 수세미로 설거지를 했다. 그런 뒤엔 물로 아주 오래도록 씻어냈다. 잔을 엎어두고 타월을 또 뜯어 개수대를 닦았다. 정말 끝이었다.
우산꽂이에서 우산을 빼내고 그대로 나가려다 멈추어 섰다. 불을 꺼야 했다. 할 수 있는 한 느리게 뒤를 돌아 스위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휘잉.
빗소리가 커짐과 동시에 찬바람이 몰아닥쳐 등을 밀었다. 작은 숨소리가 바람 소리 틈에서 힘겹게 빠져나와 나를 잡았다.
“……나 왔어요.”
말하지 않아도, 그인 것을 알고 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얼른 그를 보고 싶었다.
“나 봐요…….”
몸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애써 발을 움직였다. 눈앞이 흐렸다.
“……오늘은, 늦잠 안 잤어요…….”
눈물이 볼에 내려앉고, 눈앞에 그가 나타났다. 홀딱 젖은 채였다. 그는 새하얀 털뭉치를 꼬옥 안고 아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정말,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나는 그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슬로 모션처럼 그가 나에게 달려와 안겼다. 그의 눈물 대신 비로 옷이 젖어들어 갔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는 그대로이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