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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이이이이잉. 언뜻 손 주위를 부유하는 진동 소리에 눈을 떴다. 틀에 갇힌 듯 움직이지 않는 팔을 억지로 내저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이 시간에 전화라니, 어차피 그 놈 밖에 더 있겠냐마는. 그나저나 몇 시지……. 지용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시야에 직격으로 퍼지는 빛들 사이로 6이라는 숫자가 꽁 박혀있었다. 6시? 벌써 6시? 순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분만 있으면 알람이 울릴 텐데! 그 짧은 찰나에도 쉴 틈 없이 핸드폰은 계속 제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좀 더 확연히 선명해진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50은 족히 찍힌 부재중 전화이다. 잠에서 깨자마자 기하학적인 숫자의 부재중을 마주하려니 썩 달갑지 않다. 이 와중에도 53으로 치솟는 부재중을 보며 지용은 고개를 돌려 베개에 푹 묻었다. ……이런 미친!!! 욕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자기 전에 무음으로 바꿔놓는다는 것을 일주일에 한 번쯤은 꼭 까먹은 채로 잠에 들곤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 모양이다. 혹시라도 잘못 건드려 전화라도 받게 되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이불을 꽁꽁 뭉친 후 핸드폰 위로 무자비하게 덮어버렸다. 우웅, 우웅. 현저하게 낮아진 진동 소리에 그나마 귀가 탁 트이는 것 같다. 걸쭉하게 늘어나는 숨을 아무렇게나 뱉은 후 몸을 일으켰다. 때 아닌 새벽의 진동쇼로 잠은 저 멀리 달아나버렸다. 3시간은 잔 건가, 나? 오늘도 다크서클이 뜨끈하게 내려와 있겠지. 뻑뻑한 눈두덩을 꾸욱꾸욱 누르며 습관적으로 시간을 재차 확인했다. 오늘은 조금 일찍 출근하지 뭐. 우선은 바로 씻으러 갈까, 하다가 이불에 압사당한 핸드폰이 신경 쓰여 방향을 돌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화면을 멍하니 응시하던 지용의 어깨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나마 오늘은 58통이다. 이걸 다행이라고 말해도 되는 건가? 언제는 92통까지 간 적도 있었으니까. 부재중이라는 꼴도 보기 싫은 알림창을 지우기 위해 클릭하려는 찰나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화면에 퐁 하고 떠오른 번호에 순간 지용의 눈이 탁 트였다. 아까와는 다른 빛깔의 감정이 눈에서 뚝뚝 떨어졌다. 전화를 걸어온 상대가 최승현이라는 그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여, 여보세요?”

 

 혹시 목소리가 떨리지 않을까. 자다 일어나서 반쯤은 잠겨있지 않을까. 조잡한 고민들이 입술에서 뛰놀았다. 얼마간의 침묵 후 승현의 목소리가 나긋이 흘러나왔다.

 

 - ……어, 받네?

 

 그것은 아마 상당히 어딘가가 뒤틀린 언어였다. 그러나 아직도 다리 한 짝 정도는 무의식에 걸쳐놓은 지용으로선 별 다른 생각을 할 틈은 없었다.

 

 “당연하지. 방금 전에 깼어. 그럼 안 받을 줄 알았어?”

 - 그냥 좀. ……새벽이니까.

 

 언제는 새벽이나 낮이나 마찬가지라며. 지용이 재빨리 톡 쏘아붙이자 승현은 별 말이 없었다. 찔린 구석이 있는 모양이지. 조그맣게 쿡쿡 웃으며 다시 침대에 편히 앉았다. 아, 깜빡할 뻔 했네. 지용은 황급히 녹음 버튼을 터치했다. ……이래가지고선 누굴 욕할 처지도 안 된다. 하지만 승현의 목소리라면 작은 조각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용은 설레는 맘으로 발가락을 까딱이며 물었다.

 

 “근데 무슨 일이야? 나 조금 있으면 작업실 가려고 했는데.”

 - 그냥 잠이 안 와서. 우리 언제까지 샘플링 보내줘야 하더라?

 “내일까지 아닌가? 으으, 지겹다.”

 - 그럼 샘플링 보내고 나서 간만에 영화나 같이 볼래?

 “정말?! 요즘 보고 싶은 영화 있었는데. 제목이 뭐였지…….”

 

 성대 깊숙한 곳을 벅벅 긁는 듯한 목소리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심장이 빠른 속도로 콩콩 뛰었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데이트지? 물론 자칭 데이트라는 게 조금 슬프긴 하지만. 지용의 얄쌍한 두 다리가 매트리스를 쿵쿵 찧어댔다.

 

 - 나중에 같이 고르지 뭐. 그럼 작업실에서 봐.

 “응, 알았어.”

 

 덜컥, 끊긴 전화 소리를 뒤로하며 지용은 녹음된 시간을 확인했다. 4분 21초……. 흡족한 표정으로 액정을 쓰다듬던 지용의 검지 뒤로 갑작스럽게 진동이 웅- 하고 한 번 울렸다. 순간 누군가 빗자루로 목덜미를 쓸어올린 것처럼 모골이 송연해졌다. 떨리는 시선을 바로 잡고 액정을 쳐다보았다.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으로 액정을 짓눌렀다. 문자창이 팟, 하고 떠올랐다.

 

 「통화중이던데? ……왜 내 전화는 안 받을까.」

 

 ……미친 새끼!!! 욕지거리가 치밀었다. 그러고 보니 통화중인 건 어떻게 알았지? 부재중은 전혀 찍혀있지도 않았는데. ……뭐야, 이거. 지용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라이 같은 놈.”

 

 모르겠다. 그냥 생각하기도 싫다. 지용은 핸드폰을 침대에 박아놓은 후 일부러 발소리를 쾅쾅 내며 침대를 벗어났다. 몇 달은 되었지 싶다. 저장하지도 않은 1104의 풀번호를 외우게 된 것도 이미 한참 전의 일이다. 정확히는 3달 전부터 이 개고생을 하기 시작했고, 체념의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은 거의 한 달 전부터다. 그 두 달간의 공백기 동안 사실 안 해본 것이 없었다는 것이 더 우스웠다. 아예 폰을 정지할까 생각도 했지만 역시 그건 무리였다. 차단? 차단은 개뿔. 또 다른 번호로 전화가 온다. 수십 번의 차단공방전을 거치고 나서야 깨달은 진리였다. 직업 특성상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도 중요한 업무 전화는 많이 하기에 모조리 씹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그나마 한 톨의 위로가 되는 건 연락이 오는 시간대가 거의 늦은 밤과 새벽 정도라는 것. 그 핸디캡이 아니었다면 아마 핸드폰을 와장창 개박살 내고도 남았을 시간들이다. 물론 하다못해 신고까지 하려고 했건만 돌아오는 건 대포폰이라 추적이 어렵다는 말뿐. ……이거 진짜 개 같잖아?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역한 기운이 치밀어 올라 더는 핸드폰을 쳐다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조만간 내역이나 어서 초기화시켜야겠다. 정말로 씻기 위해 다시 욕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또 다시 익숙한 진동이 지잉 울렸다. 일정한 데시벨로 공명하는 진동일 뿐인데도 그 누군가 특유의 체취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

 

 이 시간에도 쉼 없이 날 미행하는 그의 체취가.

 

 

*

 

 

 아지트. 음산한 분위기를 콸콸 풍기는 검은 방은 그의 달콤한 아지트이다. 승현은 모니터를 핥아 내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손등으로 턱을 괴었다. 밤을 새는 건 꽤 익숙한 일이다. 모니터 화면만 뚫어지라 쳐다보는 것 역시 익숙한 일과다. 승현은 열이 올라 폭발할 것처럼 뜨끈해진 핸드폰을 책상 구석에 밀어두었다. 방금 전의 전화로 인해 곤히 잠든 모습을 더 보지 못한다는 것이 조금 아깝긴 하지만…… 애완견마냥 설치고 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도 꽤 재밌다. 그 어떤 영상보다 재밌단 말이야.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고 나서 오른쪽 어깨에 걸쳐놓은 후 박카스를 원샷하고…….”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영상 속 피사체를 끈덕지게 눈에 담았다. 행동패턴이 늘 같으니 도무지 안 외워질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하루를 줄줄 꿰고 있다는 건 꽤 로맨틱하다. 박카스를 깔끔하게 쓰레기통에 버린 후 남자는 천천히 옷장 앞으로 다가갔다. 날개 펼치듯 활짝 열리는 옷장문에 몸이 가려지자 승현은 곧바로 다른 녹화창을 틀어 줌인을 했다.

 

 “아, 그 옷은 너무 섹시한데.”

 

 새하얀 팔을 뻗어 몇 번 옷장 내부를 휘젓던 남자가 옷을 스윽 꺼낸다. 먹이를 꿀꺽 삼켜버릴 것 같은 축축한 혀로 입술을 느리게 핥아냈다. 

 

 “……저건 그 자식이 준 바지 아냐?”

 

 조금 더, 조금 더 줌인. ……더! 화면에 가득 잡힌 그의 등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조금씩 비틀면 드러나는 외설스러운 골격이라던가, 삐죽이 솟아오른 견갑골이라던가. 승현의 눈은 끝없이 하얀 살결을 좇았다. 남자는 패션에 대한 자기애가 상당히 강한 편이다. 장신구까지 다 고르기까지 대략  남자는 꽤 신중해보였다. 부드러운 크림색 바지도 좋지만 그것보단 옆에 있는 검은 가죽 바지가 좋잖아. 물론 그 하얀 바지가 다른 놈이 선물해준 바지라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니고. 승현은 의자를 조금 더 모니터 앞으로 끌어당겼다. 옷을 다 고른 모양인지 닫히는 옷장문이 턱, 하고 닫혔다. 손에 들려 있는 검은 바지를 보니 괜스레 멍청한 웃음이 비죽이고 튀어나온다. 별 것 아닌데도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뿌듯함이 잔뜩 퍼진다. 이래서 내가 놓질 못한다니까. 곧바로 다시 원래 화면으로 녹화창을 옮겼다. 아아, 제일 기다린 순간. 혈관을 타고 도는 짜릿한 느낌에 숨이 가빠져왔다. 필터 끝까지 타오른 담배를 아무렇게나 비벼 껐다. 휘날리는 뽀얀 연기들은 대충 손으로 휘저었다. 이미 영상 속 남자는 트렁크 팬티를 가볍게 벗어던진 후 갈아입을 바지를 집어 들었다. 항상 침대에 앉아 매끈한 두 다리를 공중에 치켜들고는 바짓단에 꿰어 넣고는 한다. 그 일련의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심장에 뜨끈한 무언가가 퍼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유일무이한 인간이 된 것 같은 야릇한 착각에 빠진다.  남자는 바지가 잘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다. 발목 언저리에 끼어 강하게 죄여오는 바짓단을 낑낑거리며 끌어올리고 있다.

 

 “……후.”

 

 동시에 승현의 바지 역시 내려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먼저 와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 그의 위치는 여기서 20분 정도 떨어진 가로수 길에 머물러 있으니까. 아는 사람이라도 만난 건지 움직이지 않은 채 한 좌표에서 제법 오래간 깜박인다. 자연스럽게 이가 빠드득 갈렸다.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건만……. 역시 초연해지기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계속 화면을 켜둔 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여전히 그 가로수 길이다. 아니, 조금은 움직인 걸 보면 근처 카페라도 들어간 것일지도 모른다. 무슨 얘기를 그리 나눈다고? 우연인 척 찾아가볼까? 핀트 어긋나면 뒷감당은 어떻게?

 

 “……아니야. 진정해야지. 진정.”

 

 스스로를 다독이며 승현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딸려 나오는 봉투 안에는 인화된 사진들이 겹겹이 들어있었다. 밥이라도 먹고 있는 모양인지 볼이 가득 부풀려진 사진, 의자에 기대어 살짝 잠이 든 사진부터 시작해서 뒤로 넘겨갈수록 살색의 향연들이 펼쳐진다. 그러고 보니 오늘 또 새로 인화한 사진들이 도착하는 날이었던가. 이번까지만 이용하다가 또 새로운 인화 사이트를 물색해야하겠지……. 한숨을 푹 내쉬며 사진들을 뒤적이는 승현의 손이 서걱서걱 움직였다. 늘어나는 거미줄처럼 끈덕지게 겉면을 쓰다듬던 승현의 손길이 순간 멈추었다. 제일 뒤로 빼두었던 인화 사진들이다. 조금 더 육감 있게 보이기 위해 코팅을 두 번 덧씌운 건 아무래도 잘한 일이지 싶다. 전라, 그리고 다리를 살짝 벌린 채 뒤로 꺾은 고개. 드러난 목선 사이에 승현은 입술을 묻으며 뜨거운 숨을 뱉었다. 이런 사진은 아무렇게나 찍는다고 찍히는 예술이 아니지.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곧바로 뒷장으로 넘기자 조금 더 목을 꺾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 어딘가를 야살스럽게 훑고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조금씩 베어먹듯이 숨결을 빨아들이며 야금야금 짓씹었다. 손길이 빨라졌다. 초점이 엇나간 손은 렌즈에 제대로 잡히지 않아 흔들렸다. 그 주변을 혀로 뭉근히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그 순간 핸드폰에서 지잉-, 진동이 울렸다. 근처에 온 모양이다. 가볍게 그의 얼굴에 키스를 찍은 승현이 사진들을 모아 다시 봉투에 넣었다. 당장에라도 토닥토닥 울리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플 역시 서둘러 종료한 후에 얼굴 근육을 우적우적 풀었다. 다정한 미소를 지어줘야겠지. 단단히 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할 준비라는 것은. 문이 벌컥 열리자 승현은 짐짓 놀란 척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왔어?”

 “뭐야. 어쩐지 먼저 와있을 것 같더라니…….”

 “당연하지. 전화 끊고 여유롭게 준비하다가 바로 작업실 달려왔거든.”

 

 벤 카페. 아무래도 아침엔 이곳에 들렸던 모양이다. 금빛 로고가 고풍스럽게 새겨진 아이스컵을 들고선 빨대를 물고 있는 모습이 영 멀게만 느껴졌다. 지용이 의자에 털썩 앉자 컵 가득히 차있던 얼음들이 저들끼리 도로록 부딪혀댔다. 컵을 빤히 쳐다보자 지용은 다른 의미로 오해한 까닭인지 불쑥 컵을 내밀었다.

 

 “한 입 마실래?”

 “어? ……응. 두 입 마셔도 돼?”

 “그러던가.”

 

 순순히 에이드를 내민다. 새빨간 체리에이드는 네 손이랑 잘 어울리지만 말이야, 지금은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뱉지 못할 말들을 웅얼거리며 입속에서 굴리는 동안 지용은 기지개를 하며 작곡노트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 모습을 보며 승현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누굴까. 이 단순한 질문은 도무지 뇌에 끼어 나갈 생각을 않는다. 자꾸만 삐죽이 솟는 마음이 들썩였다. 저 동그란 어깨를 거세게 바닥에 짓누르면 겁에 바싹 질린 얼굴로 덜덜 떨며 말할지도 모른다. 오면서 누구 만난 거야? 너 누구 만났는데? 23분 정도 얘기 나눴잖아. 새벽에 만날 사람이 누가 있지? 가득 차오르는 질문들을 애써 내리누르며 승현은 차분히 물었다.

 

 “맞다. 지용아, 나 오늘 오면서 고등학교 동창 만났는데 완전 반갑더라.”

 “어, 정말?! 신기하다. 나도 오늘 오면서 누구 만났거든.”

 

 그렇지. 승현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 지용의 표정을 살폈다.

 

 “……누군데?”

 “그냥 아는 형. 아, 그래! 이 형도 음악 하는 사람인데 말 나온 김에 형 소개시켜 줄까? 나이가 있는 만큼 경험도 있으니까, 뭐 서로 조언도 받고…… 좋을 거야. 응?”

 

 지용이 사르르 웃으며 팔짱을 꼈다. 승현의 팔꿈치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붙지 말라고 밀어내기엔 타이밍이 묘하게 어긋났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탓일까. 모든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솜털 하나하나가 직각으로 곤두서는 느낌이다. 숨이 가빠져왔다. 목 또한 뻣뻣해져갔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아 목구멍에 힘을 꽉 주었다. 얄팍하게 뻗은 팔목을 눈으로 훑어 내리며 타오르는 숨을 꿀꺽 삼켜냈다. 너를 보면 말이야,  

 

 “왜 대답 안 하냐? 싫다는 거?”

 “알았어, 알았어.”

 

 참을 수가 없어. 오밀조밀 따져드는 그 입술이 현란한 네온빛으로 발광했다.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고 살짝 비틀어 바닥에 밀착시키면, 아, 묶는 것도 나쁘지 않다. 찍어 누르는 그 타격감은 실제로 어떨까. 

 

 “형.”

 

 결박된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뽀얀 팔목을 사방으로 바르작거리겠지. 비명을 질러도 좋아. 네 비명 소리는 메시아의 달콤한 속삭임 같을까.

 

 “형?”

 

 붉게 번진 홍조가 전신으로 퍼지려면 몇 초 정도가 걸릴까나.

 

 “형!”

 

 순간 정신이 들었다. 살짝 멍한 표정으로 소리가 난 앞을 바라보니 지용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툴툴거렸다. 바보 같은 표정으로 하하 웃으며 귓불을 긁적였다.

 

 “아……, 미안. 요즘 너무 피곤해가지고.”

 “하긴. 빨리 끝내고 가서 잠이나 푹 자고 싶다……. 잠을 너무 못 잤어.”

 “그러자. 어제 말한 대로 내가 도입부 비트는 다시 찍어봤거든. 들어봤어?”

 “응. 그대로 가도 괜찮겠던데? 근데 약간 특이한 소리가 깔렸으면 좋겠는데. 뭐 거품 터지는 소리라던가……. 왜, 있잖아.”

 

 자료 받아뒀던 것들이 어디에 있더라. 마우스를 열심히 딸칵이며 폴더를 헤집는 지용의 모습을 끝없이 좇았다. 승현의 눈빛은 흡사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가시가 알알이 차오른 혓바닥으로 지용의 전체를 핥아 내린다. 선명한 점액질의 침이 뚜욱뚜욱 늘어져 살갗에 스며든다. 

 

 “3이랑 4파트는 킥을 좀 더 퍼지게 넣어볼까? 다운 된 느낌이 어울리려나…….”

 “엇박자로 치고나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목덜미에 눅눅해진 입술을 비빈 후 이빨로 콱 찍어버리고 싶다. 톡 하고 터진 검붉은 피는 분명 지용을 닮아 천천히 목선을 따라 흘러내릴 것이다. 책상위에 놓인 저 체리에이드처럼. 천천히, 부드럽게 그 피를 샅샅이 핥으면 어떤 탄성이 터질까. 

 

 “A파트는 그대로 마이너로 가는 게 좋겠다. 어? 형, 펜 좀 주워줘!”

 

 어쩌면 앙칼진 날숨에 취해 그대로 기절해버릴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더 거칠게……

 

 “최승현!!!”

 

 그 순간 멈추었다. 모든 것이. 마치 욕조 배수구에 모든 게 호로록 빨려 들어간 물줄기들처럼. 조용히 침을 삼켰다. 지용의 눈이 쭈악 올라간 것이 단박에 보였다. 손가락으로 그 끝을 살살 뭉개며 내려주는 상상을 하며 볼펜대를 만지작거리자 참지 못한 지용이 입을 열었다.

 

 “형!!! 진짜 오늘따라 왜 그래?”

 “어? 왜, 왜 그래.”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눈 동그랗게 뜨고 있음 다야? 형 진짜 장난해?”

 

 어쩌면 생각보다 더 단단히 화가 났을지도.

 

 “아까부터 묘하게 정신이 딴 곳에 팔려있는 거 같은데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알았어?”

 “…….”

 “뭔데. 뭐 때문에 또 그래! 마음에 안 드는 파트 있으면 즉각 말해라고 했잖아, 내가.”

 “아냐.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데…….”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줄이자 깊은 침묵이 뒤따라 붙었다. 지용은 아예 포기하기로 한 모양인지 고개를 푹 숙였다. 모가지를 푹 꺾었다가, 뒤로 젖히기를 반복하는 행동을 할 때는 화가 단단히 났다는 뜻이다. 그리고 반드시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 손동작과 함께 반복되고는 한다. 조금이나마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꺼냈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서 그랬어. 지용이 네 의견에 반대하는 거 하나도 없어. 언제나 그랬듯이 네가 힘든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니까 너무 예민해지진 말아.”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녹음기 버튼을 재생하는 것처럼 말이 술술 나왔다. 그 와중에 지용이 좋아하는 눈웃음을 살살 쳐줬다. 그런데 분위기가 반전될 기미가 도통 보이지 않는다. 조금, 조금 더 다정하게 말했어야 했나? 곡에는 정말 아무런 불만이 없는데……. 어긋난 문장과 단어들을 끼익끼익 맞추고 있으려니 나지막한 지용의 부름이 슥 들려왔다.

 

 “……아냐.”

 “어?”

 “아니잖아, 형.”

 “……어?”

 “그 말…… 예전에도 했던 말이잖아. 똑같이…….”

 “내가?”

 “그래!!!”

 

 정말 그랬나? 기억을 되짚는 시늉이라도 내며 고개를 꺾자 지용의 도끼눈이 시선을 향해 따라왔다. 

 

 “……형, 갈수록 이상해져가고 있는 거 알아?”

 

 목소리 끝이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아, 살짝만 건드려도 퍼엉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자기는 알까. 저런 모습들도 카메라에 모두 담아놓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물론 갑자기 카메라를 들이밀면 고사리 같은 귀여운 주먹으로 한 대 때릴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그대로 맞아주는 게 좋겠지.

 

 “……생각 정리되면 다시 말하자.”

 

 쾅-!!! 승현은 잠시 손을 들어 귓가를 막았다. 눈을 번쩍 떴을 때는 이미 지용이 나간 후였다. 이런…….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귓가에 엉켜 붙은 먹먹한 진동을 털어내며 혀를 내둘렀다. 아직도 문이 덜렁이며 움직였다. 지용의 평소 행동이나 성격들로 유추해보면 아마도 거의 맥시멈 수준으로 화딱지가 난 모양이리라. 어딘가 어긋난 웃음이 자꾸만 피식피식 새어나갔다. 방금도 몇 번이나 팔짱을 꼰 채로 노려보던 지용의 뒷목을 잡아채고 싶은 충동을 눌렀는지 모를 것이다. 안 돼. 아직은 잘해줘야지. 아직은. 천천히 호흡을 하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우선 몸을 일으켜 책상과 바닥을 눈대중으로 대충 훑었다. 떨어진 지용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주워 비닐에 넣은 후 아직도 덜 녹은 얼음이 깔린 체리에이드도 잽싸게 챙겼다. 달콤한 타액이 묻은 에이드컵은 요즘 들어 더욱 소중히 모으고 있는 전리품 중 하나였다. 기계의 전원을 끄고 불까지 끄고 나니 작업실은 완전한 어둠에 사로잡혔다. 지용이 거칠게 매만지고 간 손잡이를 마지막으로 훑으며 승현은 재빨리 빠져나왔다. 자동적으로 문을 쾅 닫고 나가던 방금 전 지용의 모습이 훅 떠올랐다. 그 순진한 뒤통수가 들썩이며 나가던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래봤자.”

 

 다시 전화가 걸려올 것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다. 아마도 사과를 하기 위해서겠지. 추정 시간은 약 1시간 후 정도? 벌써 작업실을 박차고 나간 것이 민망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모습이 눈에 훤한 걸. 뭐, 가끔은 달아날 수 있으면 달아나는 것도 좋지. ……다만, 없을 걸. 시간이.

 

 

*

 

 

 갈수록 이상해져가고 있다. 지용은 이것이 근례에 내린 판단 중 가장 정확한 정답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괜한 추측이 아니라 정말로 승현은 나날이 묘하게 어딘가 비틀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뭔지, 어디서 비롯되는 느낌인지조차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조금 사람이 멍해졌나? 아니면 그 사이 말 못할 큰 문제라도 생긴 건가. 오늘만 해도 정신은 반쯤 빼놓은 것 같은 태도로 일하는 내내 미지근하게 구니 걱정을 안 하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다. 역시 순간적으로 욱해서 나가버린 건 좀 그렇지? 생각이 마구잡이로 꼬여갔다. 항상 저질러 놓고 뼈저리게 후회하는 이놈의 성미가 문제라니까. 승현의 말대로 정말 요즘 예민해져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 지용은 떨리는 손으로 승현의 번호를 꾹꾹 눌렀다. 

 

 “……받아라, 받아라.”

 

 그래도 좋다. 이 모든 망상을 상쇄시킬 수 있을 정도로 형이 좋아, 승현아. 그러니 제발 받아줄래. 지용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다리를 달달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방황하는 두 다리를 바닥에 딱 붙이니 이번엔 팔꿈치가 으슬으슬 떨려왔다.

 

 - 여보세요?

 

 ……그 순간 거짓말처럼 떨림이 멈췄다.

 

 

 

 쾅. 현관문이 제대로 닫히는지 몇 번이나 확인한 지용은 후다다닥 달려 그대로 침대에 다이빙했다. 진짜 당분간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푹 쉬어야할 것 같다. 승현과 영화 말고도 이것저것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하면서 스트레스나 풀어야지. 으아아!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지용은 베개를 붙잡고 침대 위를 떼굴떼굴 굴러다녔다. 일이 예상외로 잘 풀렸다. 지용은 마시멜로를 잔뜩 입에 집어넣은 아이처럼 행복한 얼굴로 오늘 하루를 되짚어보았다. 오후에 승현이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살짝 불안했었다. 승현과 자신은 거의 모든 면에서 서로 죽이 잘 맞는 파트너였지만 그렇기에 가끔가다 한 번 부딪히면 그 여파가 상당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돌아가며 서로 굽히는 식으로 여태까지 두루뭉술하게 지내왔다. 물론 승현이 항상 다정다감하고……, 고민도 잘 들어주고…… 그러니까 가능한 일이었지만. 승현이 전화를 받은 순간 기회다! 싶어 그냥 아무 말이나 정신없이 지껄였고, 예상했던 것처럼 승현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그 잡음들을 들어주었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마무리 작업을 해야 하니 작업실에 오라는 말을 덧붙인 뒤 전화를 끊었다. 사실 아직도 그 목소리가 너무나 평온해서 화가 났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기분이 크게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실제로도 다시 찾아간 작업실에는 간식과 함께 방글방글 웃고 있는 승현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아까 잔뜩 쏘아붙이고 나가버린 탓인지 확실히 더 적극적으로 작업을 같이 할 수 있었고……. 영화 약속도 확실히 받아내고 뜻밖의 스킨십까지 했다. 지용은 괜스레 뒤통수를 한 번 슥슥 쓰다듬어 보았다. 아까 정확히는, 이 근처 부위에…… 승현의 손이 닿았던가. 평소에도 자주 물 흐르듯 하는 스킨십이긴 했지만 왠지 다가오는 느낌이 더욱 강렬했다. 거미처럼 구석구석 모근에 얽혀드는 손가락에 온몸에 박혀있는 모든 솜털이 일순간 곤두서는 듯했다.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조금은 울적한 것 같기도. 간만에 컴퓨터나 좀 해야지. 꾸물거리며 본체에 전원 버튼을 누르는 순간 익숙한 진동 소리가 들렸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이잉.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한 지용은 그럼 그렇지, 란 표정으로 전화를 피해 무음 모드로 돌려놓았다. 이쯤 되니 이 부조리한 상황에 이미 길들여진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이러다 부재중이 안 찍혀 있으면 서운하다는 생각까지 들지도 모르겠다.

 

 “……근데 진짜 누굴까.”

 

 신나게 울려대고 있을 핸드폰을 애써 무시하며 웹서핑을 하고 있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저 인간은 도대체 누구인가? 가장 원초적인 궁금증이다. 이런 짓을 하루도 거스르지 않고 하는 걸 보면 꽤 부지런한 성격일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내 얼굴을 알고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너 나 알기나 하냐? 괜히 두어 번 더 핸드폰에 시선을 준 지용이 한숨을 탁 내쉬며 손을 뻗었다. 어, 어 왜 이러지. 아예 관심을 끄기로 한 거 아니었어? 스스로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질문들을 깡그리 밀어낸 채 핸드폰을 질질 끌어왔다. 그 순간 줄지어 퍼붓던 전화세례가 잠시 멈추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넌 내 어디가 좋아?」

 

 멍한 표정으로 문자를 전송하고 난 후에야 지용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계속 무시하다 보면 언젠가 지쳐 나가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게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어딘가 홀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문자를 찍어 보냈다.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심장이 불안하게 콩콩콩 뛰었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인터넷 뉴스 기사를 몇 번씩이나 읽으며 심호흡을 했다. 지이잉. 조용하던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을 뿜으며 움직였다. 언제 진동 모드로 다시 돌려놨지……. 머리를 긁적이며 지용은 화면 잠금을 풀었다.

 

 「네 입술이 좋아. 네 향기도 좋아. 너의 가는 다리와 헐렁한 셔츠가 좋아.」

 “…….”

 「자꾸 엉덩이에 눈이 가. 나도 모르게 매끈한 허리에 손이 가.」

 「네 부드러운 머리도 좋고, 눈 아래에 살짝 찍힌 점도 좋아.」

 「네 빨간 입술이 좋고 야한 미소, 끈적이는 목소리까지 모두 좋아.」

 「보고 싶어, 권지용.」

 

 순간 자기혐오가 머리끝까지 솟아올라 핸드폰을 집어던졌다. 내가, 내가 뭘 한 거지……? 바들바들 떨리는 두 손을 억지로 품에 껴안은 채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런데 더 견딜 수 없는 건 차라리 이 상대가 승현이었으면 하고 잠시나마 생각했던 제 자신이다. 지잉. 지이잉. 끝없이 문자가 온다. 어떻게 이리도 빨리 보낼 수 있는 건지 이제는 궁금하지도 않다. 미끼 하나 물어다 준 병신 같은 자신을 욕하며 지용은 컴퓨터를 껐다. 핸드폰을 뻥 차버린 후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보고 싶다는 말 따위 하지 말란 말이야. 난 네가 없는 삶이 더 좋으니까. 이제 제발 그만 좀…… 놔줄래.

지이잉.

 

 「이제 답장 안 해줄 거야? 뭐 괜찮아. 일방적인 것엔 익숙해져서.」

 “아, 그만 보내!!!”

 

 미친 거 아냐?! 아니, 이미 미친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지용은 무음 모드로 다시 돌리기 위해 팔을 뻗어 핸드폰을 가져왔다. 허공을 향해 의미 없는 발길질을 하며 신경질적으로 화면을 터치했다. 그 순간에도, 지이잉. 

 

 「난 잡으러 다니는 거 좋아하거든.」

 

지이잉.

 

 「그러니 어서 도망가.」

 

 오 마이 갓.

 

 

*

 

 

 “너, 너무 파인 옷 입은 거 아냐?”

 “에이…… 뭐 이 정도 가지고.”

 

 승현이 지용의 옷자락을 펄럭이며 넌지시 물었다. 파, 파인 옷을 입든 말든!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각이나 하는 걸까……. 괜히 부끄러워져 손사래를 치며 걷는 속도를 높였다. 먼저 걸음을 옮기자 승현은 곧바로 따라 붙어왔다. 

 

 “그래도 요즘 별 희한한 또라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승현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지용의 옆구리를 쿡쿡 쑤셨다. 옆구리가 가려워 묘한 소름이 돋았다. 지용은 괜히 그 미미한 오한을 떨쳐내기 위해 아무 말이나 꺼냈다.

 

 “어……, 영화는 어때? 재밌었어?”

 “생각과는 좀 다른 것 같아. 역시 기대가 너무 컸나? 결말이 살짝 찝찝해서.”

 “너도 그랬어?

 “어쩌면 2편 밑밥을 까는 것 같기도 하고.”

 

 승현의 말에 지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질이 나쁜 삼류 스타일의 영화는 아니었다. 다만 상당히 난해한 스토리 진행과 풀어주지 않은 떡밥들이 너무나 눈에 거슬렸다. 아마 눈치가 없어서 못 알아챘을 수도 있겠지만. 러닝타임이 꽤 긴 편인데도 지루하지 않았으니 그 점에선 꽤 큰 점수를 줄만했다. 사실 로맨스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승현에게 낯 뜨겁게 그 말을 어떻게 꺼낸단 말인가. 괜히 시선이 민망해진 지용은 핸드폰을 꺼냈다. 무의식적으로 승현의 옆을 따라 걸으며 쉴 새 없이 자판을 쳐댔다. 

 

 “……근데 아까부터 누구랑 카톡하는 거야?”

 “엉, 그때 말해줬던 형 있잖아. 왜, 음악 한다던…….”

 “……아, 그래……?”

 “응! 우리 가는 카페에 오라고 미리 말해놨지.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소개시켜줄게.”

 

 30대 중반에 집어들은 그 사람은 승현이나 자신이 느낄 수 없는 무언가의 연륜이 묻어났다. 확실히 곡의 스며든 감정도 풍부하고 다양한 소스들도 알고 있어 지용에게 있어 꽤 훌륭한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언도 받을 수 있고, 다음 곡 소스도 좀 얻어가고……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은데.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는 편 아니었나? 승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혹시 미리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원래 싫어했던 사람이라던가. ……아냐, 이름도 말해준 적 없는데 알 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지용은 기척에 꽤 예민한 편이었다. 아주 사소한 흐름이라도 상대의 기분이 팍 꺾였다면 눈에 안 띌 수가 없다. 분명 아까 영화 얘기를 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으니 분명 방금 자신이 꺼낸 말이나 보인 행동에 반응한 것이 틀림없다.

 

 “왜……? 만나기 싫어?”

 “그건 아냐. 그냥 느낌이 안 좋아서……. 뭐, 보면 알겠지. 빨리 가자.”

 

 승현은 건조한 웃음을 지으며 먼저 앞서나갔다. 지용은 당황한 마음에 급히 약속 장소와 시간을 찍어 보낸 후 핸드폰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어! 권지용. 여기다, 여기!”

 “정우형!”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니 누군가 호들갑을 떨며 손을 붕붕 흔들었다. 승현은 아무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씹었다. 지금 저 자리는 지용이 제일 좋아하는 창가 구석 자리. 게다가 오는 시간을 고려했는지 막 종업원이 3잔의 잔을 내려놓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는 본인의 것인 것 같았고 나머지는 지용이 좋아하는 모카라떼와 자신이 좋아하는 아메리카노. 카톡으로 지용이 부탁했을 것을 생각하니 이상하게 속이 홧홧 타올랐다. 언제 한 번 카톡을 불시에 몰래 보던가 해야겠다. 비밀번호야 이미 알고 있으니까. 자신이 모르는 얘기들을 둘이서 나눴을 거란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내장이 뒤틀렸다.

 

 “너는 어떻게 된 애가 해가 갈수록 탱글해지냐?”

 “에이 무슨……. 요즘 잠 푹 못 자서 피부도 푸석해졌는데.”

 “……아닌 것 같은데? 옆에 친구가 최승현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유도하며 자리를 향해 손바닥을 내민다. 승현은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까닥이며 자리에 앉았다. 지용과 옆에 앉고 싶었는데 제 딴에서는 중매자라고 생각이라도 드는 모양인지 가운데에 떡하니 앉았다. 지용은 환하게 웃으며 승현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딱딱하고, 버릇없게 굴어도 좀 봐줘요. 괜찮은 애니까.”

 “그렇게 보이는데? 반가워. 한정우다.”

 “……네.”

 

 승현의 입꼬리가 삐끗 올라갔다. 마치 바늘로 꿰어다 억지로 당겨진 것처럼 어색한 미소였다. 한정우가 내민 손을 잡고 대충 위아래로 흔들었다. 지용의 눈길이 적나라하게 느껴지자 승현은 손에 힘을 풀고 더 살갑게 흔들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놓은 후 바지 옆단에 벅벅 문질러 닦았다. 지용이 아닌 다른 사람의 흔적이 묻는 건 사양이다. 게다가 그 상대가 저 한정우라면 더더욱. 승현의 불쾌해진 마음과는 상관없이 지용은 커피를 홀짝이며 생글생글 웃기에 바쁘다. 가식이 섞인 웃음이 아니라는 게 더욱 거슬렸다. 지용의 친구나 지인 중에서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었던가. 새로운 사람이 튀어나오자 승현의 불안감은 최고도를 찍었다. 누구냐고 캐묻기에도 민망한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승현의 손이 테이블 밑에서 하염없이 벌벌 떨렸다. 지용의 시선이 닿은 저 새까만 얼굴을 사정없이 뭉개버리고 싶다. 지용의 입김이 닿은 저 컵을 서슴없이 만지는 손가락을 사정없이 찍어버리고 싶다. 삐이이-. 요란한 이명이 들렸다. 아니, 들리는 것 같았다. 목울대가 갈라질 것 같은 고통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아메리카노를 벌컥 벌컥 마시자 두 사람이 놀란 눈빛으로 승현을 쳐다보았다.

 

 “야, 너, 너 왜 이래 임마.”

 

 주르륵, 암갈색 액체가 승현의 턱을 타고 흘렀다.

 

 “가, 가끔 이래요. 좀 성격이 4차원이라서……. 그래서 형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지용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헤헤 웃었다. 제 앞에 휴지가 있는데 건네 줄 생각도 않는 걸 보니 속으로 뜨악,하고 경악이라도 한 모양이다. 누구 때문에 지금 생각이 뒤죽박죽인데……. 근본 없는 분노가 화르르 솟았다. 누군가 숟가락으로 심장을 사각사각 갉아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승현이 천천히 휴지로 입 주변을 닦아내자 대화는 다시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애인은 그래서. 없고? 안 만들어?”

 “……어, 그게…….”

 “왜 그래. 한 명 소개시켜줘?” 

 “아녜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지용이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 하여간, 너 답다 지용아. 한정우가 호탕하게 웃으며 지용의 머리를 슥슥 쓸었다. 순간 승현은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그 손을 탁 하고 쳐낼 뻔 했다. 그러나 승현의 어깨를 짓누른 것은 지용의 입에서 튀어나온 지용의 소식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사람. ……전혀 상상도 못했던. 

 

 

*

 

 

 부자연스러운 동작을 하며 계속 몸을 뒤척였다. 어쩌면 일부러 뒤척이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아까까지만 해도 침대에 드러누움과 동시에 깊은 잠에 빠질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자꾸만 카페에서 보였던 승현의 행동들이 머릿속에서 되감기가 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입이 가볍지 않은 사람이라 조심히 행동한다고는 했는데 그 상황을 승현이 혹시 오해했으면 어떡하지. 그 순간 눈앞이 아찔하여 온몸에 힘이 쭈욱 빠졌다. 그렇다고 따로 또 설명을 하는 건 더 이상하다. 

 

 “…….”

 

 출처를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자꾸만 몸의 빈틈을 쑤시고 들어왔다. 괜히 가만히 있는 핸드폰에서 헛진동이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말도 안 돼……, 미쳤어.”

 

 정말이지, 나는 어떻게 되어가는 걸까. 지용은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혹시 기다리고 있는 건가? 무엇을? 누구의 ……연락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지용은 깜짝 놀라 쿠션을 집어던졌다. 지금 이게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승현. 최승현. 지용은 억지로 승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우형을 소개시켜준다고 하자마자 급히 찌그러지는 얼굴을 본인은 알고 있을까. 제 딴에는 표정을 관리한답시고 얼굴에 힘을 주고 있었던 것 같지만 승현의 얼굴은 누가 봐도 어딘가 화난 사람의 표정이었다. 불편하면 그냥 별로 만나고 싶지 않다는 한 마디면 되는데 말이다. 생각해 보니 승현은 참으로 우직한 성격인 것 같았다. 작업을 할 때 의견이 부딪히는 것 말고는 자신의 의견에는 거의 반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세심한 배려나 다정함이 언제나 몸에 밴 사람이다. 승현은. 지용은 조용히 카메라 앨범에 들어가 승현의 사진을 눌렀다. 승현은 자신의 사진을 찍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같이 찍은 사진들이 아니면 독사진은 도무지 찾아보기 힘들다. 여태까지 찍었던 것들을 천천히 구경하자 알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막연하게 남들보다 더 가까운 사이면,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위안했던 적도 있었다. 쌓아오던 것들이 와장창 무너져 내리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런데 몸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사랑에 절은 아둔한 몸뚱이는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닿으면 닿을수록 더 애가 타는 이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냥 승현이 좋았다. 수줍은 얼굴로 다가와 자신의 믹싱 테이프를 들어줬을 때부터. 그냥 좋았다. 밤늦게까지 작업하다 잠에 들면 항상 책임지고 집까지 데려다줬던 그 따스한 손길도 잊을 수 없다. 여전히 어딘가 멍해 보이고, 비밀이 많아 보이긴 하지만 그건 그대로 어떠랴 싶었다. 그냥, 그냥 너무 좋다. 승현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으악!!!”

 

 지이잉. 그 순간 울린 문자에 지용이 기겁을 하며 뒤로 넘어갔다. 뭐야?! 갑자기? 지용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잠금을 풀었다. 파앗 솟아오른 문자의 발신자에는 스토커 번호가 찍혀있었다.

 

 「좋아해.」

 “…….”

 

 오늘도 그냥 지나치지는 않는구나. 기묘한 안도감과 동시에 아릿한 공포감이 차올랐다. 좁은 통로를 향해 끈질기게 흘러내리는 고백. 수백 번도 더 반복되는 고백. 지용은 조용히 홈 버튼을 눌렀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 그 방향이 삐뚤어졌든, 땅바닥에 처박혔든, 하늘로 치솟았든 그 형태는 틀림없이 사랑의 변형이었다. 누구는 이렇게 끈질기게 제 맘을 하염없이 뱉어내는데 자신은 어땠나. 그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섰다. 버석버석 갈라진 손톱 끝이 쿡쿡 쑤셨다. 그 들쑤심은 팔목을 타고, 어깨를 타고, 목울대를 타고 흘러 심장을 움켜쥐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터질 것처럼 심장을 주물러대는 그 손길에 지용은 딱딱하게 굳은 숨을 그저 헉헉 내뱉었다.

 

 “……나, 나라고 못할 게 뭐 있어?!”

 

 좋아해. 지용은 다시 한 번 스토커의 문자를 떠올리며 시선을 파르르 떨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네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싶다. 빠른 차를 타고, 날쌘 날개를 달고서. 

 

 

 

 작업실을 가는 내내 다리가 후들거려 죽는 줄 알았다. 승현은 작업실에 그대로 있을까. 아마 어제 밤샘작업을 한다고 했던 것 같으니 그대로 뻗어서 자고 있거나 대충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있는 중일 것이다. 기왕이면 자는 모습 좀 구경하고 싶은데. 너무 악취미인가. 지용은 찔리는 양심을 애써 무시하며 건물 내부로 발을 들였다. 넓진 않아도 방음이 탁월하게 잘된다는 이유로 선택한 작업실이다. 조용한 공기를 가르며 조용히 문을 여니 승현의 뒤통수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의자에 기대 푸욱 늘어진 모습을 보아하니 한참 잠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분명했다. 왠지 정체모를 용기가 솟아올라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별로 크게 나지도 않는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승현의 다부진 입이 살짝 꼬물거리자 지용은 흠칫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아, 저 딱딱한 어깨에 기대어보고 싶다. 저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면 무슨 느낌일까.

 

 “저기…….”

 

 지용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 역시 전화로 말할 걸 그랬나? 막상 승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쉽사리 입이 트이질 않았다. 게다가 승현은 어제 카페에 갔다 온 이후로 살짝 알게 모르게 사람이 변한 것 같았다.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을 꼽으라면 아무것도 없지만 뭔가 더 쌀쌀해진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지금을 놓치면 다시는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이렇게 무모하게 도전할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게 뻔했다. 손을 살짝 뻗어 어깨를 툭 찔러보았다. 정말 자는 거 맞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조금 더 용기가 솟는다. 지용은 목을 큼큼 다듬은 후 불쑥 뱉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설익은 고백이었다.

 

 “좋아해.”

 “…….”

 “……좋아해, 최승현”

 

 아, 이거 꽤 쑥스럽구나. 아마 자신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어 있을 게 뻔했다. 그 순간 심해에 잠긴듯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정말이야?”

 

 지용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자는 거 아니었어? 승현 역시 순간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이내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아마도 빛 때문에 눈이 부신 듯했다. 승현은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미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웃음이 너무나 좋아서 귀 뒷부분에 가시바늘이 우두둑 솟아났다. 주머니에 뭔가가 있는 모양인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움직이자 딸칵 소리가 났다. 

 

 “아, 안 잤어?!”

 

 지용은 이 어색해진 공기를 어떻게 깨뜨릴까 눈알만 드르륵 굴리다 아무 말이나 했다. 하긴, 사실 이 고백을 듣지 못했다면 아이러니하게 서운한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실제로 어떻게 마음을 드러내야 하나 또 다시 깊은 고민의 수렁에 빠졌을 것이고, 어쩌면 아예 고백할 기회조차 없이 모든 걸 날려버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차라리 이렇게 얼떨결에 들어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소리에 사실 깼어. 민망해서 자는 척을 좀 했는데…….”

 “아 그렇구나…….”

 

 어차피 커밍아웃이라면 진즉 했다. 지용은 여기서 더 잃을 건 없다며 발딱이는 심장을 도닥였다. 승현의 마음이 어떨지 궁금했다. 지용이 머뭇머뭇 손가락을 꼬는 것을 본 승현이 물었다.

 

 “정말이야? 내가 좋아?”

 

 승현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면 그건 착각일까. 지용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카페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 것도?”

 

 지용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딱딱해보였던 승현의 얼굴이 화사하게 사르르 풀어졌다. 저 웃음의 의미는 어떤 걸까. 지용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승현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조심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아가지는, 않았다.

 

 “……형은 어떤데?”

 “내 대답은 이거야.”

 

 승현이 히죽 웃으며 지용을 끌어당겼다. 허리에 감긴 굵직한 팔이 오늘따라 참으로 낯설었다. 혹시 키, 키스라도 하는 걸까. 지용은 미칠 듯이 찧어대는 심박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승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동그랗게 빛나는 흑색 눈동자에는 지용 자신이 비치고 있었다. 승현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나도 네가 좋다. 지용아.”

 

 저 매끈한 콧날에 콧잔등이 부딪히는 기분은 어떨까. 넘치는 흥분감에 지용이 승현의 옷깃을 잡자 승현이 잠시 움찔, 하고 멈추었다. 그러더니 가볍게 뽀뽀를 한 후 머리나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지용은 민망한 얼굴로 승현의 품에서 빠져나와 건드릴 필요도 없는 파일이나 서류들을 뒤적이며 모으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뭐하고 있나 싶어 슬쩍 훔쳐보니 승현은 어느새 지용에게 시선을 거둔 후 진지함이 가득 스며든 얼굴로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뭐해? 형?”

 

 평소와 같으면 무슨 문자를 보내는 것까지는 전혀 간섭치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이렇게 달라진 태도를 보이자니 조금은 우스운 것 같기도 해서 지용은 절로 피시식 웃음이 나왔다.

 

 “그냥 마지막으로 문자를 보낼 사람이 좀 있어서.”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지용은 애매모호한 승현의 말에 고개를 기울여 슬쩍 화면을 훔쳐보았다. 에이, 뭘 보는 거야! 승현이 장난스럽게 지용의 어깨를 스윽 밀어냈다. 지용은 언뜻 보인 철자를 곱씹으며 입에서 굴렸다. RU? 웬 영어? 외국인이랑 문자라도 주고받나? 승현은 혹시나 또 다시 지용이 들러붙어 문자를 훔쳐볼까봐 손바닥으로 액정을 가린 채 쓰기 시작했다. 바보 같지만 액정보다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괜한 오기심이 생겼다. 저 손바닥으로 쓰다듬어야 할 건 액정이 아니라 바로 지용 자신이 아닌가. 문자가 뭐라고…….

 

 “있잖아…….”

 “어?”

 

 승현은 알까. 자신이 이런 변태 같고, 민망한 상상을 매일 하고 있다는 걸. 그때도 지금과 같은 달짝지근한 눈빛을 보내줄까? 확신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욕심이 났다. 승현이 지금과 같은 다정한 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건 연인으로서는 꽤나 불편할 것이다. 그래서 이상한 욕심이 든다. 조금은, 조금은 더.

 

 “형이 더 집착해줬으면 좋겠어.

 “……뭐?”

 “형은 원래도 다정다감한 사람이니까, 뭔가…….”

 

 괜히 말했나. 지용은 승현의 눈치를 설설 살피며 콧등을 긁적였다.

 

 “난 또 뭐라고……. 걱정 마. 내가 다정하게 구는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그래줄 수 있어?”

 “얼마든지.”

 

 승현은 가볍게 샐쭉 웃었다. 아마 다음 단계는 정말로 네가 힘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RUNAWAY:::

 

 

 

 지이이이이이이잉. 식탁에 놓인 폰이 대차게 진동을 하며 자가회전을 했다. 이상하게 밤에 안 온다고 했더니 아침 댓바람부터 문자를 보내고 난리다. 물론 확인할 것도 없이 스토커라고 단정을 내린 상태였기에 지용은 천천히 밥이나 마저 씹었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이깟 스토커에게 자신의 마음을 기댄 것일까. 비록 아주 조금이라고 해도 말이다. 지용은 과거의 자신을 신랄하게 비웃으며 밥을 한 숟갈 가득 퍼 입에 넣었다. 이제 예전처럼 철저히 무시모드에 돌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놈의 호기심은 불로장생인 모양인지 죽이고 죽여도 또 살아남아 혀를 날름거리며 지용을 유혹했다. 마지막, 딱 마지막으로 무슨 내용인지 보구 이제는 정말 신경 끄자. 지용은 조심히 손을 뻗어 잠금을 해제했다. 포옹 떠오르는 새창에는 밑도 끝도 없이 요상한 영어단어가 적혀있었다.

 

「RUNAWAY」

 

 순간 지용은 이상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알 게 뭐야. 다시 핸드폰 화면을 끈 채 지용은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다 먹으면 승현에게 전화나 걸어야겠다는 소소한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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