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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승현은 마지막 두장이 간신히 매달려있는 달력을 찢었다. 맨 윗장엔 선명하게 8월이 적혀있었고, 그 아래에는 오늘의 날짜가 적힌, 11월 6일이었다. 그는 빨간색으로 수십개의 원이 그려진 8월 18일을 애달픈 눈빛으로 어루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는 이내 치우지 않은 쓰레기들이 가득 쌓인 방안을 둘러봤다. 

 

 “오늘 자로 이별 한지 87일째네요.”

 

 

 

2.

 이젠 이름만 들어도 지긋지긋한 남자다. 핸드폰에 부재중만 벌써 몇 통인지 모르겠다. 통화목록 뿐만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문자, 음성사서함까지도 모두 지배해 버린 남자다. 스팸차단을 하라고 새로운 애인이 계속 말하지만 내버려뒀다. 그러는 그가 안쓰럽기도 했으니까. 그의 집착이 싫었던 것은 아닌데, 예술가처럼, 히피족처럼 살아가던 내가 메여있다는 사실이 눈에 보이게 된 순간부터, 그는 내게 수갑이었고 족쇄였다. 심지어는 이별 후에도,

 

 ‘권지용. 옆에 그 사람 누구야?'

 '나보다 잘해줘? 

 '그사람 때문에 우는거야?’

 

 새로운 애인과 데이트를 하던 중 문득 확인해본 핸드폰에 저런 문자가 와있었고 그에 소름돋은 나는 주위를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나 보여? 벌써 잊은거야? 섭섭하게.’

 

 누구나 이런 말을 들으면 소름이 끼쳤으리라. 보이냐니. 어디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물론 이건 약한 범주에 속했다. 애인의 신상 정보가 날아오는 일도 허다했다. 지쳤다. 도통 정리할래야 할 수가 없어. 그가 얼마나 나를 물고 늘어질지, 그 때문에 내 인생이 얼마나 더 망가질지는 신밖에 모르는 일이다. 끊는 것도 나의 몫이고 마음 정리도 나의 몫이었다. 하지만 흔들린다. 그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며 내뱉었던 가지 말라는 말, 그리고 그의 집착을 즐기던 나, 이 모든 것이 파노라마 처럼 스쳐간다.

 

 “이별 87일째. 나는 아직도 세고 있어요.”

 

 

 

3.

 88일째 아침. 오늘은 기필코 만나고야 말거라는 다짐을 한 듯한 승현의 표정은 비장했다. 더러운 방 어딘가에 이날 만을 기다렸다는 듯 잘 관리를 해놓은 옷을 꺼내 입었다. 가뜩이나 진하고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 승현이었지만, 근래에 굶었는지 몸이 많이 야위어있었다. 쓰레기들 사이로 항상 움직이던 틈이라도 있는지 익숙한 발걸음으로 문밖으로 향했다. 바깥 햇살이 익숙하지 않은지 승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자동적으로 확인하는 핸드폰. 혹시나, 행여나 지용의 문자가 올까봐, 전화가 왔을까봐 이젠 무의식적으로 확인하는 모양새가 안쓰러웠다. 지용이 쓰는 메신져란 메신져를 모두 알고 있는지 접속 시간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상이 아니라는 건 본인이 가장 잘 알고있었다.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승현의 모습이 수상해 보였다. 그는 이내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이제 닳도록 닳아버린 듯 한 지용의 익숙한 번호를 누르다가 다시 또 정신이 돌아온 듯 모든 번호를 지워버렸다. 승현의 머릿속엔 온갖 생각들이 떠올랐다. 어떻게 해야 지용을 만날 수 있을지. 행여나 우연히라도 길에서 마주칠 가능성은 없는지.

 발은 익숙해져 버린 그 길로 향했다. 이별하고 나서도 며칠을 그 곳에 머물러 있었던 승현이다. 지용과 처음 만났던 거리. 그 곳에서 한동안 승현은 노숙자와 다름이 없는 생활을 했었다. 그와 걸었던 거리를 추억을 회상하며 걷고, 그와 앉았던 벤치에 앉아서 잠을 청했었다. 어쩌면 승현 자신도 지용을 닮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지용은 거리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길고양이 같았으니까.

 

 

 

4.

 한편 지용에게 오늘은 정말 운이 좋지 않은 날이었다. 같이 거리공연을 하기로 한 친구들과 위치싸움을 하다가 한바탕 깨져버렸다. 어릴 때 하던 땅따먹기같은 유치한 짓임은 틀림없었지만, 그게 그들에게 생존방식이었고 돈벌이었다. 간혹 지용도 승현이 그리워 질때가 있다면 그것은 아늑한 잠자리와 집, 돈이 있다는 것때문에. 그리고… 모르겠다. 그저 바보같이 순진해 빠진 남자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헤어진 이후로는 무서운 남자, 내 인생을 방해할지도 모르는 남자따위의 완전히 다른 호칭으로 그 남자는 변해 버렸다. 지용에겐 그의 행동에 대한 원인을 추측할 여지조차 없었다. 시도때도 없이 날아오는 전화 그리고 문자. 이미 용량을 초과해 버린 음성사서함. 그저 인조이였던 돈많은 남자로만 여기기에는 그 사람은 너무 집요했다. 그러나, 정말 바보같고 미친 소리지만 그가 보고싶었다. 본인이 누구보다 나쁜놈이라는 걸 잘 아는 지용이다. 자신이 최승현을 이용해서 살 곳을 얻어볼 생각도 있었고,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면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려고 했다. 뻐꾸기 어미가 새끼를 다른 둥지에 낳는 것과 같은 원리처럼 말이다. 

 지용은 원래 지금쯤 공연을 하고 있었어야 할 거리를 걸었다. 이유없이 걷기는 했지만 어쩐지 계속 승현이 생각나서 찜찜해졌다. 문득 그가 그리웠다. 그는 그저 내가 이용해 먹으려고 했던 수많은 남자들 중에 하나였는데. 그렇게 걷던 지용이 다다른 곳은 한 남자가 앉아있던 벤치였다. 그 남자가 누군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내 지용은 깨달았다.

 

 “잘 지냈어?”

 

 승현이었다.

 

 

 

5.

 언젠가 지용은 말했었다. 우리 헤어지고 나면 마주쳐도 신경쓰지 말고 그냥 가던 길 가자고. 승현도 말을 걸 의도는 아니었다. 정말 이별 88일째 그의 생일로부터 88일째 되는 오늘에 기적처럼 나타나버린 지용이 반가워서, 그러나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본인도 모르게 잘 지냈냐는 안부를 묻게 된 것이다. 하지만 표정을 살펴보니 괜히 물었나 싶었다. 보나마나 또 이 길 어딘가에서 도둑고양이 처럼 치이다 왔을게 분명했다. 이정도는 어려운 추측도 아니었다. 그의 사생활을 꿰뚫고 있던 승현이니까. 

 

 “가자.”

 

 두번째 기적이 일어났다. 정말 예전 같으면 왜, 어딜가냐고 손을 뿌리쳤을 지용인데, 그저 순순히 승현의 손을 잡고 일어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날카롭게 거절해 오던 지용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일이 있는 건 틀림 없었다. 승현은 지용과 걸었다. 처음 만났던 그 길을 생각없이 걸었다. 솔직히 승현은 본인이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지용과 걷는 중이었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떨림, 설렘 이런 감정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둘은 의식의 흐름대로 걷고 있었다. 그렇게 둘이 다다른 곳은 승현의 집. 승현은 집안의 모습이 어떤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듯 하다. 익숙한 비밀번호 ‘0818’ 을 누른 승현은 문을 열었다. 

 

 “형 왜 그런거야."

 

 정말 오랜만에 입을 연 지용이었지만, 승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익숙하게 언제나 다니던 쓰레기 속 길을 따라 부억으로 향했다. 오랜시간 사용하지 않은 주전자를 꺼내 물을 끓이고 얼마 남지도 않은 커피믹스를 뜯어 두개 밖에 없던 머그잔에 부었다. 

 

 “가서 앉아있어.”

 

 앉을 곳이 여기서 어디에 있는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 지용이지만 예전에 늘 승현과 앉아있던 조그마한 공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거짓말 같게도 그 공간만에는 쓰레기가 없었다. 어쩌면 승현은 언젠가 돌아올지 모르는 지용의 자리를 남겨놓았을 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키우던 새끼 고양이를 잃어버린 주인처럼 따뜻한 집을 찾아 돌아올 지용을 안아줄 최소한의 자리를 말이다.

 

 

 

6.

 둘은 오랜만에 한 공간에 앉아있었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힘겹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승현의 목소리에 지용이 전에는 느껴보지도 못한 다정함이 묻어났다. 언제나 소중한 것은 잃고 난 후에서야 소중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다. 승현을 떠난 후에 간신히 거리 공연으로 번 조그마한 수익으로 매 끼니를 간신히 떼웠고, 잘 곳이 없어 빈 건물이나 다른 사람들이 쓰다 간 연습실에 몰래 들어가 자곤 했다. 그 사이에도 돈을 목적으로 생각보다 많은 여자와 남자들을 만나왔다. 승현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더러워져 버렸다. 지용의 입에서 나오던 그 동안의 일들은 승현에게 큰 충격을 안겨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형은 어떻게 지냈길래 방이 이 지경이야.”

 

 나야 잘 지냈지. 보고 싶을때마다 문자도 하고 전화도 걸어 봤었어. 음성사서함에 메시지도 남겨보고 어차피 답장이 없을 것이라는 건 각오하고 있었지. 더 이상 살아갈 이유도 없었었고 그랬기에 무언가를 먹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쓰레기 쌓인 방에 박혀서 핸드폰을 들고 너 연락을 기다리는게 다였지. 너는 몰랐겠지만 너가 길거리 공연 있을 때 가서 돈 넣고 온적도 있었어. 그 날 바로 너가 애인 만나는 것도 봤었고 그래서 그냥 안부나 물을 겸 문자 보내봤는데 어땠을지는 모르겠네. 구질구질하지. 구차하지. 알아, 아는데. 아는데..

뭔가 오해라는 이름의 실타래가 풀리는 듯 했다. 어린 새끼고양이가 주인이 던져놓은 엉킨, 살면서 한번도 본적이 없는 실타래라는 물체를 보고 무엇인지 이리저리 굴려 보다가 두려워도 했다가, 이제서야 주인이 엉켜 버렸다는 걸 알고 풀어주고 갔다. 더이상 두려워 할건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언제나 지용에게 승현은 지나간 남자가 되어버린 지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싫증이 나버린 걸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이 남자를 깨끗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최승현이라는 이 깨끗하던 사람이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텨나갈지, 얼마나 더 심한 집착에 빠질지는 미지수라고 생각하는 지용이었다. 아무리 본인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라지만, 이 사람을 더더욱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깨끗하게 정리해야 한다...깨끗하게. 

 

 "상처줄 생각도 없었고 이렇게 더럽힐 생각도 없었어."

 "언제까지나 더러운 놈은 나 하나로 족했고 굶어 죽어가는 것도 나 하나로 만족했으면 됐잖아. 왜 사지멀쩡한 다른 인간들 냅두고 여기서 이러고 사는거야? 나처럼 돈이 없어? 돈 잘벌고 살면서 왜 거지딴따라 하나 못잡아서 이러고 살아. 제발 이젠 다른 사람 좀 찾아보면 안될까? 그래 솔직히 나도 이게 편해. 최승현 옆에서 살면서 그렇게나 필요하던 돈 받아먹고 따뜻한 데서 잠자고. 근데 내 취향 맞춰서 강제로 억지로 변해가는 당신 모습보면서 미안하기는 또 얼마나 미안했는지는 알기나 해? 나 좀 놓아줘. 잘있어. "

 

 승현의 입이 떨어지기도 전에 지용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용은 울고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승현을 사랑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를 미친듯이 원한다는 걸 알고 있다. 어쩌면 눈앞에 펼쳐질 하루하루를 견디지 못할 것은 승현이 아닌 지용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문을 나서는 지용 뒤에 남겨진 승현은 나지막히 말했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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