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나를 8월의 아이라 불렀다. 8월의 여신의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받은 가문의 희생자.
나는 이 땅을 더럽힌 공작 家에서 태어났다.
내 아버지의 손에서 일가족의 몰살을 겪은 여인의 저주를 받고.
8월의 여신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결국 자신의 여덟을 벗어나지 못한 채 죽게 될 것이다.
어렸을 땐 섬뜩하기만 했던 저주가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아무렇지도 않았다. 심장이 떨리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설렘 때문이다. 나는 기꺼이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신과 함께.
곧 여덟 시가 다가온다.
열여덟의 생일을 맞이한 오늘, 나는 죽게 될 것이다.
*
파티는 지루했다.
젖가슴을 거의 다 드러낸 채로 왈츠에 맞춰 움직이는 여인들의 향은 지독했고, 나는 도무지 흥이 나질 않았다. 곧 열여덟의 생일이 찾아올 것이다. 요즘의 나는 계속 이런 생각들로만 시간을 허비했다.
열여덟의 생일 전까지 나는 여인을 안아볼 마음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아쉽지만 아쉽지 않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역시 제일 아쉬운 점을 고르자면 누군가에게 감정을 소비해본 적이 없다는 것. 나는 어쩌면 내 생각보다 더 감성적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몸이 약한 탓에 방 안에 틀어박혀 해치우듯 읽었던 책들의 영향일까.
멍하니 그런 생각들 따위를 하고 있었다. 자각하지 못한 사이 왈츠가 끝났다. 곧 그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현악기들이 역동적이게 움직인다. 여인들의 살랑거리던 움직임이 대범하게 변했다. 탱고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내 하루는 이런 무료한 파티 장에서 샴페인 따위를 홀짝이며 끝이 난다. 나는 2층 난간에 기대어 아래의 홀 안 사람들을 바라보며 입매를 뒤틀었다. 붉은 빛 샴페인이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손목에 힘이 빠지겠다 싶으면 그제야 힘을 더 주는 식이었다.
그 순간에도 탱고는 빠르게 리듬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지루하신가 봐요.”
그래,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첼로가 가파르게 악보 위를 넘나들던 때. 나는 예상치 못한 저음에 손에 쥐고 있던 잔을 놓쳐버렸다. 산산 조각난 유리잔보다 더 큰 여인들의 비명 소리에 모든 감정이 부서질 듯 격동적이던 탱고도 끊어졌다. 당신의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이런.”
낮은 웃음소리를 곁들인 목소리. 나는 첫 만남부터, 당신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신났던가. 마냥 웃음이 났다. 술기운이었을 수도 있었을 테고, 당신이 누구인지 익히 들어 왔기에 ‘장난감’이 내게 굴러들어온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았을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그때의 감정은 기쁨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렇게 기억하기로 했던 것 같다.
“T?”
“저를 아시나 보군요. G님.”
“런던에서 널 모르면 병신이지.”
“아아. 그런가요.”
짐짓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목소리에는 여전히 우아한 웃음이 기대 있었다. 밝아 보였다. 하지만 따뜻한 밝음은 아니었다. 얼음의 빛이었다.
“흡혈을 한다고?”
파티가 시작되기 일 년 전 즈음, 사람들은 모두 당신에 대해 떠들어댔다. 소리 없이 등장해 단숨에 백작의 지위까지 오른 이방인. 정확한 출신도 모르는 당신에 대한 뒷소문은 음습하게 밑바닥을 굴러 퍼져나갔다. 본래 소문이라는 것은 질이 나쁠수록 더 빠르게 움직이는 법이었다.
짙은 외모에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진 흡혈귀.
백작 家를 들어선 낯선 사람들 치고 멀쩡하게 돌아온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즈음에는 흡혈귀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었기에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금단의 이미지에 비현실적인 비주얼이 합쳐져 여자들이 더 빠져든다고 했다.
나는 시종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주워듣고 괴물 주제에 팔자가 좋구나,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은 불만 같기도 했다.
“궁금하십니까?”
당신의 입술 선이 가늘어지며 찢어지듯 올라간다.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즐거운 예감은 덫이었고 쇠로 된 아가리는 언제든 닫히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내 피라도 마시려는 건가?”
“원하신다면,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너는 말끝마다 웃고 있구나.”
“자꾸 맛있는 냄새가 나니까요. ……같이 가시겠습니까?”
“지금 널 따라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글쎄요, 하면서 당신은 웃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지겠죠.”
그리고 외진 곳으로 나를 끌고 간 당신은 망설임 없이 내 목덜미를 물었다. 당신은 맛있는 냄새라고 했지만 내 코끝에 닿는 향은 비린내뿐이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비린 존재였다는 것을 나는 그 날 처음 알았다.
또한 첫 흡혈의 그것은, 난생 처음으로 내가 느껴본 쾌락이었다. 그것이 성적 쾌감이든, 피에서 피로 이루어진 정신적 교감에서 온 쾌감이든, 나는 너무나 생소해서 당신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당신의 목 뒤를 껴안은 손가락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온몸이 간지러운 기분이었지만 벌레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당신이 내 몸 곳곳을 긁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힘이 빠지는 것 같으면서도 힘이 들어갔다. 호흡이 가빴다. 피가 빨리는 느낌이 선명해서 기뻤다.
하지만 당신도 가여운 걸, T. 오늘의 식사는 저주받은 피로구나.
그게 또 우스워서 나는 당신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쿡쿡 웃었다. 어쩐지 데드라인이 더 가까이 당겨져 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방금 당신에게 안겼나. 그런 기분이었다.
“애무.”
흘리듯 내뱉은 말에 당신은 어땠지?
웃었던가. 목 안으로 웃음을 터뜨리며 내게 이를 더 세게 박아 넣었던가.
*
우리는 침대에 누워 있다.
시간은 빠르면서도 더디게 흘러갔다. 나는 생일을 8일 정도 남겨두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팔. 열여덟.
그러다 문득 당신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당신에 대해 내가 관심을 갖고 물어본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당신은 의아한 낯빛이었다. 나는 나로 인해 시시각각 움직이는 당신의 근육들이 사랑스러웠다.
“내 나이?”
연인이라고 불릴 만 한 사이가 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말을 놓기 시작한 당신의 몸은 새하얬다. 차갑고 견고한 몸은 만지고 있으면 조각 같아서, 나는 그럴 때마다 이미 내가 죽어 천국에 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천국에만 있는 다비드 상 같은 것. 실제로는 흡혈귀와 저주 받은 인간일 뿐이지만 꽤 근사하게 느껴졌다.
“모르는 게 나을 텐데.”
“알고 싶어.”
그래서 나는 때때로, 잠시나마 천국의 기분을 느끼기 위해 당신의 몸을 쓰다듬었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하얀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곧 붉은 피로 뒤덮일 것들. 순백만큼 쓸데없는 것은 없었다.
“한…… 사백년 정도 살았을까.”
“사백씩이나?”
“그래, 아마도.”
“정말 괴물이구나, 넌.”
정수리 위로 당신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살랑살랑 봄바람에 맞은 것처럼 머리칼이 흩날렸다.
당신은 왜 당신의 숨으로 당신의 차가운 몸을 녹이지 못할까. 문득 당신이 가여웠다. 등을 안아줘야겠다고 생각해서, 등을 안아줬다. 품에 안고 보니 내가 안기는 꼴이 되었지만 우리는 그 자세로 한참이나 붙어 있었다.
“그래, 너는 저주 받은 아이라서 괴물을 만날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되는 건가.”
“응, 넌 태어났을 때부터 날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거야. 어때, 이제 그 빌어먹을 여신에게 감사할 마음이 생기나?”
이번엔 내가 웃었다. 휘어지는 눈가 위로 당신의 입술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있지.”
“응.”
“나는 가끔 생각을 해.”
“어떤?”
“내가 피를 토하고 죽어갈 때, 그 피를 네가 다 먹어줬으면 좋겠어. 너는 나에 대한 것이면 그게 무엇이든 다 가지고 싶다고 했잖아?”
“피를 먹고, 그 다음엔?”
“다음은 없어.”
“…….”
“그냥, 죽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맘껏 웃었다. 나는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기뻤다. 당신의 차가운 손이 내 얼굴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붉은 혀를 서로 얽으면서 두툼한 혀가 폭죽처럼 터지는 상상을 했다.
우리는 더러운 감정을 주고받는다. 탁한 호흡과 함께 찾아오는 죽음이 기꺼워지기 시작했다.
*
다시, 오늘이다.
시계는 누가 발명해냈던가. 인간이 발명해낸 것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시계 침 소리는 심장 고동 소리를 닮아 있다. 내 옆에 있는 당신에게 웃어 보이기 위해 입술을 열자 붉은 꽃잎들이 후두두 쏟아졌다. 너는 계절을 피워내는 사람이었을지도 몰라. 당신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덩어리가 혀에 걸리고 맛이 비려 웃을 수가 없었다. 입 꼬리가 달달 떨리며 경련이 일어났다.
“키스해줘.”
그래도 저 말만은 꼭 하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 곧 당신의 입술이 다가오고, 당신은 아픈 표정을 짓고 있다. 정말 아픈 걸까.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은 괴물인데. 아픔도 느낄 수가 있었나?
우린 고작 몇 달을 알아 왔다. 입술이 겹쳐지고 혀가 얽히고 말없이도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바라보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깊이 들어간 적은 없었다. 나는 나였고 당신은 당신이었다. 가끔 나는 우리를 우리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우리이기 전에 나와 당신에서 출발했다.
나는 이제야 고백한다.
내가 처음 당신에게 느꼈던 감정은 불만이 아니라 동질감이었음을. 나는 우리가 닮아 보였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나와 닮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거짓말처럼 당신이 나타났다. 내 목덜미를 물고 피를 앗아가는 행위에 정성이 넘친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첫 만남부터 내게 공을 들였던 것이다. 비단 그 이유가 내 피 한 번 얻고자 함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무슨 맛이야?”
입술이 떨어졌다. 우리의 입술은 같은 꽃잎에 물들었다. 나는 또 한 가지를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키스를 나누고 피를 흘리는 입술에서 헐떡이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예전에, 고아이던 시절, 막 피에 눈을 떴을 때. 너무 갈증이 일었지만 사람이었던 기억이 강해 내 손으로 도저히 사람을 죽일 수가 없었을 때.”
당신이 말하기 시작한다. 나는 집중했다. 당신은 말하면서도 간간히 내게 입 맞추며 피를 빨았다.
“그땐 무덤을 파내거나 길거리 시체들을 찾아 피를 빨아먹었지.”
“괴물처럼…….”
“그래, 괴물처럼. ……그런데 너 알고 있어?”
“뭘?”
“너한테선 죽음의 맛이 나.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는 거야. 아, 나도 이제 죽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
“그럼, 내 피를 다 먹으면 너도 죽을까?”
“글쎄, 그럴지도.”
“죽었으면 좋겠다.”
내가 말했다.
“진심이야?”
당신은 웃으며 묻는다.
“응. 너도, 죽었으면 좋겠어.”
“그럼 죽을게.”
“가능해?”
“가능해, 너라면…….”
다시 입술이 부딪혔다. 우리의 입술 사이로 붉은 줄기가 생겨난 것 같았다. 우린 이제 한 몸이 되는 거야? 물어도 당신은 대답이 없다. 나를 온전히 앗아가고 죽이는 일에만 집중했다.
8월의 여신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결국 자신의 여덟을 벗어나지 못한 채 죽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죽어갔다. 빌어먹게 감사한 여신의 뜻대로. 그러나 나는 저주와 동시에 축복을 받고 태어난 사람이다.
영원한 죽음.
저주의 독을 삼키고 우리는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
